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빨리 글로 정리해야만 한다. 어제의 기억이 아직은 제법 많이 남아있다. 이 기억을 글로 남기는 이유는 이 날의 추억이 너무 소중하고 잊지 못할 추억이었으며, 오랫동안 이 추억의 힘으로 즐겁게 지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만큼 어제의 추억은 너무 아름답고 잊지 못할 추억이다. 어제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오른 말이 있다. 예전의 코미디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했던 대사다. “산 넘고 물 건너 샤샤샤!” 기억이 가물가물한 이 대사가 갑자기 떠오른 것도 매우 희한한 일이다. 그렇다. 어제 걸었던 경기둘레길 31코스는 그 대사 그대로다. 산을 넘었고, 물을 건너며 즐겁게 웃고 떠들며 보냈다.
호우특보가 내리고 전국이 물 폭탄으로 난리가 난 상황이다. 이제 경기 둘레길은 두 코스만 남겨진 상황이다. 26코스와 31코스. 원래는 26코스를 진행할 예정이었는데, 임도로 절개지가 많아 혹시나 낙석의 위험이 걱정되었다. 또한 많이 내린 비로 길이 막힐 수도 있고, 산길이 물길로 변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26코스보다는 좀 더 짧고, 걷기 쉬운 코스인 31코스로 변경해서 걸었다. 비가 많이 오니 한 주 쉬었다 걸을까도 고민했지만, 이왕 시작한 거 예정대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고, 현장 상황에 맞춰 대처하면 될 것 같아 그대로 진행했다. 그리고 위험을 감수한 만큼, 또 나오기 싫은 마음을 억지로 돌이켜 걸은 만큼 자연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추억’이라는 큰 선물을 남겨 주었다.
출발 지점인 양동 농협 정류장에 도착하니 갑자기 빗줄기가 거세지며 많은 비가 내린다. 농협 옆 텐트 안에서 장비를 점검한 후 제복처럼 똑같은 우비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 재복이나 유니폼은 소속감을 대표한다. 붉은 악마의 정열적인 붉은 티셔츠는 우리나라 축구의 응원단으로, 그 옷만 입으면 모두 열정적인 축구팬이 된다. 예비군 복을 입으면 모두 갑자기 모든 예의와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 예비군복이 만들어주는 군중심리다. 그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같은 우비를 입고 같은 걷기 동호회 소속임을 확인하며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걷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신에게 확인시켜 주며 세찬 빗줄기를 뚫고 나가 걷는다. 1년 이상 우리의 안전을 책임지며 출발지점과 도착지점까지 미니버스를 운전해 주신 기사님은 우리가 마치 종교집단 같다고 하신다. 맞는 말씀이다. 이런 호우에도 걷겠다고 나와서 비를 맞으며 걷는 일은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광신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종교는 ‘걷기’다. 우리의 종파는 ‘걷기 마당’이다. 우리의 소속은 ‘경기둘레길’이다. 걷기 교의 걷기 마당 종파 내 경기둘레길 소속으로 매주 주말마다 걷는 종교행사를 하고 있다.
도로도 중간중간 물에 잠겨 많은 웅덩이를 만들어 내고, 우리는 웅덩이를 피해 훌쩍 뛰어넘거나 웅덩이 주변의 풀 위를 걷는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신 주민께서 냇가에 물이 많이 차서 더 이상 진행하기 힘들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하지만 광신도들은 그런 으름장 정도는 쉽게 무시하며 걷는다. 일단 확인 후 결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직접 우리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주민의 말씀을 믿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우리가 직접 확인 후 결정을 내리겠다는 의미다. 과연 큰 물길이 나아갈 길을 막고 있다. 갑자기 당근조아님께서 앞으로 치고 나가며 무플까지 차오른 냇가를 건넌다. 아쿠아 슈즈 같은 다섯 발가락 신발을 신고 있는 당근조아님은 먼저 몸으로 ‘할 수 있다’를 보여 주신다. 우리는 등산화를 벗고, 양말을 벗고, 손에 들고 스틱을 지지대로 삼아 냇가를 건넌다. 물길이 제법 세다. 당근조아님은 건너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거나 스틱을 잡아주며 동료들을 돕는다. 이런 일은 세 번이나 발생했다. 세 번의 번거로운 과정, 즉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건너고, 다시 신고 걷는, 을 지나오면서도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하고 수다는 끊이지 않는다. 주산님과 당근조아님은 무거운 돌을 옮겨와 징검다리를 만들어 준다. 특히 당근조아님의 특공대 기질은 구조대 역할을 하듯 물을 거슬러 올라와 브리지 역할을 하며 우리의 안전을 책임져 주었다. 이날의 MVP는 당근조아님이다.
냇가를 건너고 산길을 오른다. 산길도 이미 물길이 되어있다. 위험하지는 않지만 물길을 피해 이리저리 껑충껑충 뛰며 동심으로 돌아간다. 정상에 도착한 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 하산하는데 눈앞에 멋진 선경이 펼쳐진다. 가득한 산안개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으며 추억을 남긴다. 드디어 산길이 끝나고 도로가 시작된다. 앞으로 약 4km 정도만 가면 도착지점이다. 하지만 이제 경기 둘레길도 흔히 얘기하는 ‘말년’이다. 굳이 이 지루한 길을 모두 걸어야만 하는가라는 객기가 발동한다. 종교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걷기 교의 목적 역시 우리의 행복이다. 걷는 것과 시원한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과 어느 것이 우리의 행복에 기여할까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한다. 카페에서 여유롭게 차 한 잔 마시는 걸로 결론이 났다. 도착 지점 2km를 남겨 놓고 카페에 들어간다. 매사 철저한 광신도들은 혹시 카페가 영업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확인 전화까지 하는 극성을 부린다. 카페 이름은 ‘반디 coffee & tea". 부부가 주말에만 운영하는 카페로 정원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카페 역시 매우 안락하고 편안하다. 주인인 부부의 얼굴에 나타나는 여유로움과 평화로움, 그리고 친절함이 보기 좋다. 나중에 꼭 한번 다시 방문하고 싶은 카페다.
기사님께 전화를 드려 카페로 픽업을 부탁드렸고, 함께 차 한 잔 마시며 여유를 즐겼다. 스탬프를 찍기 위해 차로 약 2km 정도 이동해서 찍은 후 우리의 종착 지점인 합정역으로 출발한다. 다시 비가 내린다. 차 안에서 비 구경하며 이동을 하니 이 또한 멋진 여행이다. 비는 우리를 반겨주는 고마운 친구다. 출발지점에서 강하고 세찬 빗줄기가 우리를 반겼고, 걷는 도중에 비는 멈추어 우리를 맞이한다. 그리고 걷기 마친 후 귀경길에 다시 비가 내리며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비는 환영을 의미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 오늘의 비는 우리를 환영하고 우리에게 멋진 추억을 남겨주기 위한 환영 인사며 동시에 자연이 우리에게 내린 선물이다.
합정역에 도착해서 소금구이 집에서 뒤풀이를 한다. 고기맛은 좋은데 주인 인심이 영 아니다. 그래도 걸은 만큼 열심히 먹고 마시며 다시 길 얘기를 한다. 앞으로 어느 길을 걷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나누며 또다시 길 얘기, 아니 종교 얘기를 이어간다. 광신도들이 맞다. 식당에서 나와 커피숍으로 들어가 또다시 종교 얘기를 한다. 이제 우리 종교는 국제화를 위한 해외 전법활동을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에 우리는 다시 똘똘 뭉친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들은 해외 전법활동, 즉 해외 걷기로 이들의 활동영역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한국 무대는 너무 좁은 것 같다. 걷기 교 걷기 마당종파 경기둘레길 소속 모든 광신도들에게 행복과 평온이 함께 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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