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다가온다. 이미 겨울인데 아직도 겨울이 아니다. 바람도 제법 불고 날씨도 쌀쌀하지만 강풍도 아니고 추운 날씨도 아니다. 걷기에는 아주 적합한 날씨다. 아침에 일찍 서둘러 집을 나오며 추위를 느끼고 걷기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밤길에 추위를 느낀다. 길 위에서 즐겁게 걷고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가정의 고마움을 느낀다. 길을 떠나는 일은 일상에서의 일탈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 일탈은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 활기로 다시 일주일을 활기차게 보낸다. 또한 길을 떠나는 일은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자신의 갇힌 생각을 열게 만들어주고, 자신만 알고 지내던 삶의 모습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배우기도 한다. 33km라는 긴 길을 걸으며 자신의 한계에 도전을 하며 한계를 극복하기도 한다. 길동무들과 함께 수다를 떨며 삶의 힘든 부분을 녹이기도 하고, 혼자 조용히 걸으며 자신을 성찰하기도 한다.
걷는다는 것은 건강한 두 다리와 체력, 그리고 건강한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무릎 연골 수술을 하며 일상적인 걷기가 얼마나 고마운 일이고 기적인가를 체험했다. 누군가에게는 기적 같은 걷기가 누군가에게는 일상이다. 기적을 고맙게 받아들이느냐 아니며 기적을 아무 일도 아닌 듯 무시하며 살아가는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런 면에서 길동무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늘 만나는 길동무들을 마치 기적을 만난 듯 고맙고 반갑게 맞이하느냐 아니면 덤덤하게 맞이하느냐 역시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있다. 어떻게 주어진 삶의 모습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이 기적이 될 수도 있고, 무료한 일상이 될 수도 있다. 환경이나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간다. 결국 삶은 수용이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면 그 안에서 내면의 평화와 벅찬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또는 그 반대의 삶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삶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다.
경기 둘레길 46, 47코스를 하루에 걸었다. 33km에 달하는 거리를 약 8시간에 걸쳐 걸었다. 혼자 걷는 것이 아니고 길동무들과 함께 걷는다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부담이 되기도 한다. 함께 끝까지 걷는다는 것은 자신만 잘 걷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힘들 때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며 걷고, 끝까지 함께 걷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요즘 한창인 월드컵 경기를 보며 팀 플레이의 중요성을 배운다. 그와 같이 함께 걸으며 팀 플레이를 배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연결된 존재라는 중요한 진리도 체득하게 된다. 혼자 걸으면 쉽게 걸을 수도 있고, 또는 힘들어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걸으면 혼자 걷는 것보다는 힘들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동료들 덕분에 즐겁게 걷고 포기하지 않게 된다. 내가 완주하기 위해서는 길동무들이 잘 걸어야 한다. 그리고 길동무들이 완주할 수 있게 내가 잘 걸어야 한다. 개인의 태도가 팀 플레이를 좌우한다. 그리고 ‘나’가 ‘너’가 됨을 체득하게 된다. ‘너’ 때문에 걷는 것이 힘든 게 아니고, ‘너’ 덕분에 즐겁게 걷는다. ‘너’가 잘 걷기 위해 ‘나’가 잘 걸어야 하고, ‘나’가 잘 걷기 위해 ‘너’가 잘 걸어야 한다. 결국 ‘나’와 ‘너’의 분리가 아닌 ‘우리’가 되어간다. ‘우리’는 한 ‘우리’ 속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이자 하나이다.
해군 함대 사령부 끝 부분에서 수도사를 만난다. 수도사는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가던 중 하룻밤 머물렀던 암자가 있던 곳이다. 목이 말라 마신 물이 해골 속 물이었다. 마실 때는 갈증 해소를 잘했지만 다음 날 아침에 해골물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속이 뒤집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일체유심조’라는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된 곳이 바로 이 수도사이다. 수도사에는 원효대사 체험관이 있다. 경기 둘레길 중 일부는 ‘원효길’과 겹친다. 아마 원효대사가 걸었던 발자취를 따라 수도사까지 걷는 길일 것이다. 사찰 입구에 큰 현수막이 걸려있다.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글이 걸려있다. 그 글귀가 고맙고 반갑다. 수도사는 원효대사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찰임에는 분명하다. 사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은 예수와 부처가 하나이고, 진리의 세계도 하나라는 의미일 것이다. ‘너’와 ‘나’의 구별이 사라진 극락과 천당을 의미한다.
매향리 평화 생테 공원에 들어선다. 아픈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다. 과거 미 공군 사격장으로 사용되었다가 주민들의 노력으로 지금은 평화가 깃든 평화생태공원이 조성된 곳이다. 넓은 공원 저 멀리 소녀상이 보인다. 그 뒷모습이 외롭고 쓸쓸하고 애달프다. 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소녀의 작은 몸이 바닷바람을 맞고 서 있다.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 아닌 삶을 체념한 모습처럼 느껴져 마음이 먹먹해진다. 주변의 여러 조형물이 평화를 상징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조형물로 인해 오히려 소녀상의 모습은 더욱 초라하고 처연하고 안쓰럽다. 평화를 위한 사격장이 주민들에게는 희망이 사라지고 마음속 평화마저 사라진 아픔만이 서려있는 곳이 되었다.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주민을 위한 평화인가? 아니면 각국의 이익과 정치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평화인가? 과연 ‘평화’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맞을까라는 강한 회의감이 든다. 평화를 위한 무기 확보와 훈련,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국민을 사지로 몰아놓는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부디 소녀상의 마음속에 따뜻하고 편안한 평화가 깃들기를 마음 모아 기도한다.
공원을 지나 화성 방조제를 걷는다. 약 8km에 달하는 곧게 뻗는 직선도로를 걷는다. 나는 이런 길이 좋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오직 나의 두 다리에 의지해서 걷는다. 다리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명령을 내려야 한다. 걸으라는 건강한 명령을 내려야 비로소 두 다리는 건강하고 리드미컬한 두 발의 반복 운동을 시작한다. 걷는다는 것은 마음이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면 이런 길에서 지치거나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아무 생각 없이 묵묵히 걷기 위해서는 건강한 정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길을 걸으며 삶을 돌아보기도 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힘찬 전진을 할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걷고 난 후의 충만함으로 보다 더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방조제 왼편에는 바다가 보이고 오른편에는 간척지인 습지가 보인다. 바다 위 하늘에서 구름이 걷히며 해가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며 바다에 멋진 노을을 만들어낸다. 비록 바다 전체가 노을로 물들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다소 아쉬운 노을은 그림 속 빈 여백처럼 마음 한 구석에 오랫동안 남는다.
방조제 2/3 지점쯤에서 반대 방향에서 오는 길동무를 만난다. 빨강내복님이 서울에서 일정을 마치고 우리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궁평항에서 걸어온 것이다. 반갑고 고맙다. 먼 길을 달려온 길동무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어니님과 엑소님은 ‘경기 갯길’의 남은 구간을 사전에 모두 걸었기에 연천 길을 걸을 때 만나기도 했다. 그들과 함께 걸었던 지난 길과 추억이 그립고,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그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33km에 달하는 긴 거리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길동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길동무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우리는 걸으며 감사함을 배우고 느낀다. 일상이 기적이고 그 기적에 감사함을 느끼며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를 마음에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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