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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341] 행복한 책 읽기 1회기 (힐드리드 할머니와 밤)

by 걷고 2022. 3. 8.

날짜와 거리: 20220306 - 20220308  34km

코스: 홍제천 - 월드컵공원 - 불광천 외

평균 속도: n/a

누적거리: 6.226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지인의 추천으로 책 읽기 모임에 동참했다. 28년간 독서 치료 모임을 진행해 온 수녀님께서 이끄시는 모임이다. “독서치료(Biblio therapy)는 ‘책 읽기를 통한 마음 치료’입니다. (..........) 책 읽기를 통하여 마음 어딘가에 숨어있는 상처의 근원을 인식하고 그 상처가 완화되거나 치유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 독서치료입니다.  (...........) ‘읽기와 듣기’는 ‘받아들이는 언어’, ‘쓰기와 말하기’는 ‘만들어 내는 언어’로 독서치료는 이 4가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배포 자료) 첫 모임에서 나눠준 배포 자료에 독서치료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게 나와 있다. 일반 독서 모임은 정보나 지식의 공유와 확대라면 독서치료 모임은 영성의 회복과 심리적 상처의 치유라는 차이점이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정보나 지식은 대부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물론 분야와 양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생존에 필요한 만큼은 어느 누구나 갖고 있다. 그것이 전문적인 기술이 될 수도 있고, 처세술이 될 수도 있고, 전문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될 수도 있고, 육체노동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지식과 정보는 살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이지만, 살아가면서 이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할 생각조차 못하며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있다. 먹고사는 일은 물론 삶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하나 만을 목표로 살아간다면 어느 순간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거나, 좌절을 견뎌내지 못해 자신이 만든 깜깜한 땅굴 속에 갇혀 살아갈 수도 있다.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된 후에, 또는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영성의 추구는 풍요로운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영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최근에 읽었던 책에서 답을 유추해 본다.      

 “너의 가족, 너의 방, 너의 과거로부터, 너를 닮은 모든 것에서부터 뛰쳐나와라! 이게 출발의 사상이거든요. 이 소설(탕자, 돌아오다, 앙드레 지드)은 바로 실낙원, 즉 낙원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낙원을 탈출하는 이야기예요. 역(逆) 유토피아, 유토피아를 거부한다는 것이죠. 거기에 눈물과 뒤범벅된 웃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설로 떠나는 영성 순례, 탕자, 돌아오다 편, 이어령 저)    

 

 빵만 추구하거나 과거의 습관대로 살아가는 삶이 비록 온실처럼 보이고, 유토피아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을 추구하는 삶은 점점 영성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영성’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두 가지 의미가 나온다. 그중 하나는 “인간의 삶의 가장 높고 본질적인 부분이며 진정한 자기 초월을 향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역동성을 통합하려는 고귀하고 높고 선한 것을 축구하는 삶의 실재 (상담학 사전)”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모든 자녀들에게 주어진 영적인 성품을 말한다.(교회 용어 사전)”라고 정의되어 있다. 결국 영성이란 자신을 내려놓은 후 얻을 수 있는 고통의 산물이자 선물이다. 삶의 고통은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얻게 해 준다. 교만은 높고 굳건한 자신만의 성을 쌓는 것이고, 겸손은 자신의 성을 부수고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다. 자신을 못 버리거나  부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영성에 가깝게 다가갈 수가 없다. 자신을 버린 만큼 영성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자신을 버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권력, 부귀, 명예, 학위, 사회적 지위 등과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다. 포장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포장지가 사라져 버리면 자신의 실체마저 저절로 사라진다는 두려움이나 불안감을 갖고 있기에 더욱 집착하기도 한다. 또는 어쩌면 자신의 실체를 이미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방법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며 원래 본모습을 되찾아 가는 방법이다. 과거의 상처에 머물고, 그 상처가 족쇄가 되어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며 에너지와 시간을 모두 소모하기도 한다. 과거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옥죄는 족쇄는 저절로 풀어진다. 실은 족쇄는 애초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 우리 스스로 족쇄라는 허상을 만들고, 그 족쇄를 부수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과 싸우듯 불필요한 소모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삶이 과거에 머무는 이상 현재와 미래는 사라진다. 명상이란 과거의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지금-여기’에 살아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오늘 함께 공부했던 책 ‘힐드리드 할머니와 밤’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둠이 싫어 어둠을 쫓아내려고 수많은 방법을 사용하지만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큰 자루에 담아 버리거나, 불에 태우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때로는 달래기 위해 자장가를 불러주거나 우유를 먹이기도 한다. 쓸데없는 노력을 하느라 몸은 기진맥진하여 해가 뜨는 아침에 되자 그 밝음을 보지 못하고 잠에 든다. 이런 생활은 반복되면서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어둠을 즐길 수는 없을까? 달과 별들을 보며 대화를 하거나 달빛 아래 조용히 걸을 수는 없을까? 쫓아낼 수 없는 것을 쫓아내려는 어리석음이 일반적인 우리네 삶이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지혜다.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할 수 없는 일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현명한 대처 방법이 될 수 있다.      

어둠과 밝음은 마치 태어남과 죽음처럼 과정에 불과하다. 산을 오를 때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밝음을 쫒고 어둠을 밀어내려고 한다. 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화를 낸다. 쫒고 밀어내는 마음은 욕심이다.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화를 낸다. 그리고 욕심의 밑바닥에는 어리석음이 있다. 평생 어둠만 존재하지 않듯, 평생 밝음만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원칙과 섭리를 거스르려고 쓸데없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 교만심을 버리면 주어진 삶을 수용하게 된다. 수용은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고 오히려 당당하고 매우 적극적인 태도이다. 새로운 일을 찾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보다, 지금-여기에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고 창의적이며, 이런 삶은 활력이 넘친다.  삶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의미를 숙고하게 되고,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소명이라는 것이 저절로 찾아온다. 소명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며 존재의 의미를 다시 깨우쳐주고,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되면 삶의 수용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수용, 존재의 의미, 소명은 실은 같은 뜻의 다른 단어에 불과하다.   

 

 마지막 시간에 ‘봄’을 주제로 각자 닉네임을 정하고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닉네임들이 모두 활기차고 밝다. 희망, 아지랑이, 수선화, 새싹, 살아있음, 샘, 눈부시게, 태양, 라일락 향기. 이 닉네임은 모두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타인들이나 다른 존재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이름들이다. 이미 모두 자신의 성을 어느 정도 부수고 밖으로 당당하게 나온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총 10회기로 이루어진 ‘행복한 책 읽기’ 모임을 통해서 모두 행복한 나날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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