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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269] 걷기는 삶의 잡철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by 걷고 2021. 9. 3.

날짜와 거리: 20210828 - 20210902 36km
코스: 지리산 둘레길 전지훈련 (안산 자락길) 외
평균 속도: 3.3km/h
누적거리: 4,751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지리산 둘레길 출발 전까지 약 3주 정도 남았다. 혼자 걷는 것이 아니고 선배와 친구들과 전지훈련을 겸해 함께 안산 자락길을 걸었다. 오랜 기간 인연을 이어온 고마운 분들이다. 최근에 만난 친구 한 명이 함께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한 친구 외에는 모두 60대 중반이다. 홀로 걷는 즐거움도 좋지만 가끔은 혼자 걷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혹시나 있을 사고에 대한 걱정도 있고, 걷기를 마친 후 취침 전까지 혼자 있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걸으며 느낀 소감을 글로 정리도 할 수 있고, 혼자만의 한가함을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 걸으며 쌓은 추억은 앞으로 나이 들어가면서 삶의 충전제가 될 수도 있다. 앞으로 시간이 더 흘러가면 함께 걸을 수 있는 기회와 사람의 수가 변할 수도 있다. 늘기보다는 줄어들 가능성이 더 많다. 지금 만나고 있는 친구들이 점점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각자 걷는 속도나 습관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차이가 전혀 불편하지 않다. 속도가 빠른 사람이 천천히 걸으면 되고, 늦게 걷는 사람이 조금 속도를 높이면 된다. 자주 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서로 맞추면 된다. 예전에는 이런 차이로 인해 불만이나 불편함을 느꼈던 적도 있지만, 이제는 그 정도는 쉽게 넘어설 수 있다. 나이 들어감이 좋은 이유는 이런 시빗거리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는 불교 가르침이 있다. 간택한다는 의미는 시비를 가린다는 의미다.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 이 방법이 좋고 저 방법은 나쁘다, 이 물건이 좋고 저 물건이 싫다, 이 사람은 사랑스럽고 저 사람은 밉다는 분별심을 내는 것을 말한다. 이 분별심만 내려놓을 수 있다면 삶은 저절로 편해지고 굳이 ‘도(道)’라고 말할 것도 없는 ‘도’를 이루게 된다.

함께 걸은 후 뒤풀이를 하며 서로 살아온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60년 이상 살아오면서 풍파를 겪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은 자신만의 삶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부모와 자식, 친척과 친구, 적과 동지 등 수많은 인연과 엮이며 살아간다. 사람 외에도 수많은 상황을 맞이하며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사람과 상황이 우리네 삶을 만들어간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마치 담금질하듯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해간다. 나이 들어감은 늙음이 아니고 익어간다는 노래 가사는 멋진 진리의 표현이다. 힘든 상황이 없었다면, 우리는 자기 잘난 맛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아갈 수도 있다. 자아 성찰의 기회를 빼앗기는 것이다. 반성과 성찰은 삶의 성숙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며, 이들은 힘든 상황과 사람들을 만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삶의 실존적 딜레마이다.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한다. 종교나 과학의 발달도 삶의 불편함을 배제시키고 편안함 추구를 위한 방편이다. 취미 생활을 하거나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 일에 매진하거나 성공을 추구하는 것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일들, 상상하는 모든 것들, 만나는 모든 사람들 역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도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다른 딜레마를 만들어 낸다. 시도를 통한 실패는 또 다른 고통을 만들어 낸다. 수 없이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서 어떤 시도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저절로 고통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시도는 의지가 들어가 있고, 의지는 자신의 이기심이 바탕이 되어있기 때문에 발생한 일련의 과정이다. 자기를 내려놓지 않는 한 삶의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자신의 의지라는 또는 이기심이라는, 또는 자기라는 의식이 만들어 낸 허상에 속아 다른 허상을 만들어 내고 거짓 놀음에 울고 웃는다. 유식학(唯識學)은 불교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오직 의식으로만 이루어져 있을 뿐이라는 것을 밝히는 이 학문은 불교의 무아와 무상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무아와 무상의 의미를 모르는 무지(無知), 즉, 어리석음으로 인해 고통이 발생한다. 유식학을 이론적으로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면 일상에서 반복된 연습을 통해 체득해 나갈 수 있다. 이 역시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겪은 후에나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딜레마이다.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음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장애를 만나는 딜레마. 이런 숙성의 과정이 삶에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딜레마,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포기하느냐 아니면 꾸준히 시도하느냐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있다.

지리산 둘레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는 또 다른 딜레마에 빠지거나 딜레마를 딜레마로 알아차리고 벗어날 수도 있다. 자신을 담금질하기 위한 좋은 시도이다. 세 명 이상이 걸으면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자신을 담금질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길을 걸으며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도 있고, 성찰과 반성을 할 수도 있고, 길동무들과의 사소한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함께 걷는 것은 자신을 담금질하기 위해 스스로를 용광로에 던지는 일이다. 충돌이 없다면 스스로 마음속에서 일거리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차림을 하게 되고, 알아차림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번뇌 즉 보리 (煩惱 卽 菩提)’라는 가르침이 있다. 번뇌가 바로 보리 즉 깨달음이라는 의미다. 번뇌가 바탕이 되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알아차릴 대상을 통해서 마음공부를 해 나갈 수 있다. 대상이 사라지면 멍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는 성성적적(惺惺寂寂)과 상반되는 상태이다. 깨어있으나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멍한 상태에 빠진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스즈끼 순류 선사는 유일한 저서 ‘선심초심(禪心初心)’에서 “번뇌가 올라오는 것이 명상이고,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알아차림의 대상이 확연히 드러난 상태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간화선에서 얘기하는 ‘화두’와 일맥상통한다. 걸으며 수많은 생각들이 올라오고 사라질 것이다. 좋은 공부 거리가 저절로 생긴 것이고, 스스로 공부 거리를 만든 것이다. 걸으며 깨어있음이, 알아차림이 지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없는 걷기는 단순한 신체 운동에 불과하다. 물론 신체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깨어있는 마음이 함께 한다면 이 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왜 걷는가? 서울에도 길이 많은데 왜 굳이 지리산까지 가서 걷는가? 일상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통해 습관의 변화를 만들기 위한 시도이다. 일상의 할 일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변화는 결국 익숙한 습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익숙한 마음 근육의 변화를 위해 자신의 변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걸으며 새롭게 만들어진 연약한 마음 근육을 일상으로 돌아와 단련시키며 더욱 강하게 만들어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 걷기는 삶의 잡철을 녹여내고 순수한 철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번 지리산 둘레길이 이런 과정이 되길 바란다. 앞으로도 매주 목요일에는 서울의 여러 길을 걸으며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 위한 체력 훈련을 할 것이다. 이 체력을 바탕으로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마음 근육을 새롭게 형성하는 기회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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