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와 거리: 20210820 - 20210822 22km
코스: 불광천, 월드컵 공원 외
평균 속도: 4.1km
누적거리: 4,689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며칠 전 지인이 개인적인 부탁을 해왔다. 큰 일은 아니고 사소한 일이지만 마음에 자꾸 걸린다. 개인적인 수고와는 별도로 소액의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 소요 비용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그분이 그 비용을 지급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음에도 뭔가 마음이 편하지 않다. 나의 경우에는 아무리 사소한 부탁이라도 비용이 단돈 100원이라도 들어가는 일이라면 미리 지불하거나 아니면 마친 후 지불하겠다는 구두 약속을 반드시 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편이다. 그냥 내 성격이 그렇다. 남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부담스럽기에 가능하면 혼자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왜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이 쓰일까?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스스로 옹졸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의 일 외에 다른 사람의 일이나 사회 현상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내 관심사 외의 일에 호기심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냥 내 할 일 하고, 남에게 피해 안 주고, 각자 또 함께 살아가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다.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늘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는 사람이다. 필요 이상의 관계 맺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하는 것도 불편하다. 함께 있을 때 만나는 사람들과 즐겁고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 자리를 떠나면 쉽게 잊는 사람이다.
물론 몇몇 사람들과는 좋은 인연을 맺고, 서로 안부도 물어보고, 가끔 그 사람들을 위한 염려를 하기도 한다. 내 자식과의 관계도 그러한 편이다. 그들의 삶에 가능하면 개입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는 편이다. 그들 삶의 주인은 그들이기에 부모라고 해서 어떤 삶의 태도를 강요하지 않는 편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가끔은 딸아이가 서운해하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아빠로서 자식들의 요청이 들어오면 그 일은 가능하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고 한다. 다행스럽게 딸 부부는 무척 독립적이다. 가끔은 아이들의 그런 모습이 나도 서운하게 느껴진다. 이번 일로 인해 며칠간 마음이 편하지 않고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나 자신이 옹졸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마음이 불편하다. 나는 정말로 속 좁은 옹졸한 사람일까? 남에게 자그마한 친절 베푸는 것도 싫어하는 이기적인 사람일까? 많은 생각을 하다 예전 기억이 떠오르며 마음의 변화 과정을 돌아보았다.
약 10년 전 상담 공부하기 이전에 우연히 상담심리사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어서 물어본 적이 있다. “왜 나는 어떤 책임을 맡거나 주변 사람들이 부탁을 해오면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걸까요?” “선생님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세요. 홀로서기도 힘들게 살아오셨잖아요? 지금도 힘들게 버티고 있는데 누군가가 부탁을 해오면 부담스럽지 않겠어요?” 이 한마디 말이 많은 위로가 되었다. 상황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든 그 당시 나로서는 홀로서기가 힘들었다. 같은 상황이라도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다른 태도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나의 힘듦이 우선이었다. 상담에서 내담자가 느끼는 주관적이 고통을 그대로 인정하고 상담을 진행해야 된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점이다. 책임을 맡는 일과 사소한 부탁에도 부담감을 느끼는 원인을 알게 되면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상담 수련 과정 중 교육 분석이라고 해서 내가 내담자가 되어 상담을 받는 과정이 있다. 나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상담사의 상담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6개월간 매주 상담을 받았다. 어느 날 상담 선생님께서 내게 “자신의 감정을 contain 하면 어떻게 되나요?”라고 물었다. 내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잊어버리려고 다른 행동을 취하거나, 억지로 억누르기 위한 노력을 하거나, 공격적으로 표출하지 말고 마음속에 담고 있으면 어떤가라는 질문이다. 이 말씀이 질문이면서 동시에 답이 되어 큰 도움이 되었다. 돌아보니 마음속 불편함을 빨리 털어버리기 위해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떠들거나, 마음속 깊은 곳에 억눌러 감춰두거나, 가끔은 상대방을 말로 공격하거나, 마음속으로 미워하며 욕을 하기도 했다. 불편한 상황을 정확하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사림이어서 이런 태도를 취해왔다. 엄부 밑에서 자란 양육환경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의견을 건강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환경이 조성되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이후부터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면 마음속에 담아두는 연습을 해왔다. 잘 안 될 때도 있었고, 참으며 며칠 지나니 아무런 일도 아닌 것을 알게 되어 허탈한 적도 있었다. 요즘은 솔직하게 표현을 하기도 하고, 무시하거나 그냥 잊어버리기도 한다.
신경정신과 노(老) 교수 한 분을 찾아가 만난 적이 있다. 평생 상담과 약물치료를 해 오신 그분께 상담사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조언을 부탁드렸다. “투사를 조심하고, 상담사로서 도덕성을 유지하라.”는 답변을 해 주셨다. 도덕성은 불필요한 상담을 오랜 기간 진행하지 말고 내담자를 위한 상담사가 되라는 말씀이다. 상담사로서 또 상담을 직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오직 내담자만을 위한 상담을 진행하라는 말씀이다. 투사는 자신의 모습이 상대방을 통해서 비치는 것이다. 내가 A를 미워하고 있는데 A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을 투사라고 한다. 즉 상담사가 자신의 마음을 늘 맑고 투명하게 만들지 않으면 상담사의 심리적 불편함이 내담자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는 말씀이다. 그 이후 상대방에 대한 어떤 감정이 올라와도 그 감정이 내 것이라는 사실을 억지로라도 자각하려고 노력을 해 왔다. 지금도 이 연습은 반복적으로 하고 있지만, 잘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평생 이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최근에 유식학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다. <상식에서 유식으로> (정승석 저)라는 책을 세 번 정도 읽었다.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며 명상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잠재 인상으로 잠복해있는 번뇌가 종자이며, 구체적인 심리현상으로 표출되는 번뇌가 가시덤불이다. 뿌리를 제거하기에 앞서서 당장 앞 길을 가로막는 줄기들을 쳐내어 그 번성을 억제하는 것. (…..) 꿈틀거리며 삐져나오는 불편한 심리든, 그것을 발동시키는 자신의 마음을 먼저 되돌아보면서 그 발동을 무마하고 달래려고 생각하는 데서 이미 유식의 수행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이 글이 크게 와닿았다. 외부 자극에 불편함을 느끼면 그 외부 자극을 향해 공격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그 외부 자극을 불편하게 느끼는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라는 말씀이다. 내가 상대할 적은 밖에 있지 않고, 바로 내 마음속에 있다. 같은 자극에 사람마다 다른 반응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 각인된 과거의 경험들이 지금 주어지는 자극에 대한 영향을 미쳐 반응하고 있다. 꽃을 애인에게 선물한 사람에게 꽃은 ‘사랑’이다. 하지만 꽃집에서 근무한 사람이 사장에게 꽃으로 머리를 맞았다면 그 사람에게 꽃은 ‘폭행’이 된다. 꽃은 죄가 없다. 다만 꽃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꽃에 대한 반응이 다를 뿐이다. 요즘 반복적으로 마음공부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을 살피며 외부 자극에 대한 비난과 공격 대신, 불편함을 느끼는 마음을 바라보며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는 것. 이것이 바로 명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금강경 경구가 떠오른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일체의 인연 따라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바라 볼뿐이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아직도 자신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홀로서기 위한 투쟁, contain, 투사와 유식을 통한 공부 과정은 아직도 나를 뛰어넘지 못하고 내 안에 갇혀있다는 반증이다. 그런 면에서 제목에 나온 질문인 “나는 옹졸한 사람인가?”에 대한 답변은 “맞다. 나는 옹졸한 사람이다.”이다. 언제쯤 이런 옹졸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따뜻한 말 한마디, 부드러운 얼굴, 나눌 수 있는 여유,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용기, 남의 고통이 진심으로 나의 고통이 되는 날이 언제나 올 수 있을까? 언젠가 가능한 날이 올 수도 있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자신에게 약속하고 싶은 것이 있다. 자극에 대한 반응을 미리 자각하여 습관적인 반응 태도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반복을 통해 언젠가 옹졸한 그릇이 깨어지면 저절로 주변과 하나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또는 결과로써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이 올라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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