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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265] 영화 ‘완벽한 가족’ (스포 포함)

by 걷고 2021. 8. 20.

날짜와 거리: 20210819   7km

코스: 불광천 한 바퀴

평균 속도: 4.1km

누적거리: 4,667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두 딸의 어머니인 여주인공은 병을 앓고 있다. 남편은 의사로 앞으로 부인이 어떤 증상을 겪게 될지 잘 알고 있다.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심지어는 음식물 섭취와 배설도 삽입한 관을 통해서 할 수 있게 된다. 부부는 합의 하에 존엄사를 결정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한다. 가족들을 모두 집으로 불러 모아 생애 마지막 파티를 열고 선물을 나눠주고 덕담을 나눈 후 약물을 마시며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는 보는 내내 무겁게 다가온다. 죽음을 앞에 둔 설정 때문인지 일상적인 생활 모습도 뭔가 어색하고 어둡다. 가족들은 엄마의 죽음 앞에서 눈치를 보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조심하며 마치 살얼음 위를 걷듯 이틀 밤을 같이 지낸다. 

 

 영화를 본 후 과연 존엄사가 의미 있을까?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존엄사의 정의는 무엇일까? 어떤 죽음을 존엄사라고 하는가? “회생 가능성이 없는 사망 임박 단계의 환자가 연명 목적의 치료를 받지 않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며 생을 마감하는 행위를 뜻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존엄사의 의미는 불필요한 연명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분명히 명기되어 있다. 연명치료를 하지 않는 것과 약을 먹고 목숨을 끊는 영화 속 죽음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사하기 전까지는 살아있는 존재이다. 환자에게 무의미한 불필요하고 고통스러운 치료는 하지 않는 것이 환자나 가족들을 위해 좋은 일이다. 나 역시 불필요한 연명치료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작성해서 의식이 없을 경우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자신과 가족, 그리고 병원과 사회에 약속을 한 것이다. 

 

영화 속 죽음은 어쩌면 이기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모습이 추하고 앞으로 겪을 고통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다. 삶이 고통이듯 죽어가는 과정도 고통이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고통은 시작되고 이 고통은 죽기 전까지 지속된다. 삶은 바로 고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굳이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고 고통과 편안함의 반복된 과정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삶은 고통과 편안함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편안함이 있기에 고통을 느낄 수 있고, 고통을 느낄 수 있기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편안함과 고통은 삶의 양면이다. 고통을 피한다는 것은 편안함을 피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우리는 행복에 대한 과한 믿음과 기대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 같다. 행복은 ‘편안한 마음 상태’이다. 마음의 상태는 매 순간 변한다. 행복은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물건처럼 늘 지니고 다닐 수도 없다. 흐르는 물을 잡을 수 없듯이 행복도 잡을 수 없다. 다만 흐르는 세월 속에 고통과 편안함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금언을 되새기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기대나 추구는 오히려 지금-여기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존재하는 순간을 잊고 신기루를 쫓기 때문이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고통에 대해서도 과한 경계심과 불편함을 지니고 살아간다. 고통은 편안하지 않은 상태이다. 오랫동안 서 있으면 앉고 싶어 진다. 오랫동안 앉고 있으면 눕고 싶어 진다. 서있는 것이 고통이고, 앉는 것이 편안함이다. 조금 후에는 앉는 것이 고통이 되고 눕는 것이 편안함이다. 고통과 편안함은 이렇게 매 순간 변화한다.

 

 삶이 고통과 편안함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힘든 것을 억지로 괜찮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힘들지만 살아가는 것이다. 좋은 것을 억지로 붙잡는 것이 아니고, 좋은 것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떠나보낼 줄 아는 것이다. 고통과 편안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고통 속에서 편안함을 발견할 수 있게 되고, 편안함이 어느 순간 고통으로 변하는 과정도 자각하게 된다. 이런 반복된 과정을 통해서 삶은 고통과 편안함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고통을 과도하게 피하려 하지 않고, 편안함을 과도하게 취하려 하지 않는 평상심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영화 속 죽음은 그런 면에서 그다지 편하게 다가오지 않고 씁쓸함을 남긴다. 약물을 복용하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가 오히려 비겁하게 느껴진다. 고통을 피하고 편안함만을 추구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좋은 모습만 남겨두고, 추한 모습은 감추려는 비겁한 행동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모든 과정을 온전히 겪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또한 고통과 편안함은 결국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 할수록, 더욱 이 두 가지를 온전히 맞이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런 삶이 당당하고 진실되게 살아가는 삶의 태도이다. 부처님도 깨달음 이후에 두통으로 시달리셨다고 한다. 어릴 적 장난으로 물고기 머리를 막대로 친 것이 업보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소한 언행도 업보로 나타나 자연의 섭리를 보여주며 가르쳐주고 있다. 자신이 지은 일로 인한 업보는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업보로 인한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피하는 비겁함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당당함이다. 

 

 며칠간 속이 아파서 고생했다. 이틀간 죽만 먹고 지내니 몸에 힘이 없다. 굳이 먹지 않아도 될 음식을 과식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 원인으로 인해 위통을 앓게 되었고, 밥 대신 죽을 먹었다. 위통은 수시로 나를 괴롭혔고, 괴로울 때마다 빨리 낫길 바라며 과식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어쩌면 며칠 전 과음했던 것도 원인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순간적인 즐거움을 선택한 결과가 고통이라는 과보를 낳았다. 결정하고 실행한 과보를 받으며 우리는 배우고 성장하게 된다. 고통을 피하면 배우거나 성장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고통은 굳이 만들 필요도 없지만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통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화 제목이 ‘완벽한 가족’이라는 설정도 재미있다. ‘완벽’은 ‘허점투성이’를 의미한다. 우리네 삶은 완벽을 꿈꾸며 살아가는 허점투성이다. 어느 누구, 어떤 삶도 완벽할 수 없다. 이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사람들의 어떠한 삶도 모두 의미 있고, 존중받아야만 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가족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각각 다르지만, 이 ‘다름’이 있기에 허점투성이가 모여 완벽한 가족을 이룬다. 영화는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이해하게 되며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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