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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263] PTC 그리고 73, 76, 77, 79

by 걷고 2021. 8. 16.

날짜와 거리: 20210815   11km

코스: 불광천 – 한강공원 – 광흥창 외

평균 속도: 4.6km

누적거리: 4,629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PTC (Pine Tree Club)는 1958년도에 설립된 영어회화 클럽이다. 고등부와 대학부가 있고, 서울 외 부산, 대구, 광주 지부가 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까지 이 서클에서 활동하며 영어를 배웠다. 내가 사회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이 서클을 통해서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별 다른 재주가 없고 소극적이며 자신감이 없었던 내가 영어를 통해 조금씩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신라호텔 취업된 것도 영어 때문이었고, 아메리칸 엑스프레스에 취업한 것도 영어를 비교적 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외국계 기업 대상 인테리어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영어로 PT가 가능했기에 시작할 수 있었고, 헤드헌팅 업무 역시 외국계 기업 위주로 진행했던 이유도 영어를 읽을 수 있고, 영어로 보고서를 쓸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어는 내 생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중요한 도구였다. 아내가 삶의 기준을 만들어 주었다면, 영어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선후배 관계를 통해서 대인관계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야 하는지 서클 활동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대학 시절 만난 선후배들과 지금도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나이를 계산하기가 어려워 학번으로 정리했다. 73, 76, 77, 79 네 명 중 세 명의 생일이 8월이어서 76집에서 모여 생일 파티를 했다. 73은 와인과 가자미 식해를 준비했고, 77은 와인을 준비했으며, 79는 샐러드와 생일 케이크를 준비했다. 영어회화 서클 회원들답게 potluck 행사를 했다. 76은 집에서 온갖 요리를 준비했고, 심지어는 아드님을 시켜서 광장시장에서 가서 빈대떡, 돼지고기 편육, 어리굴젓 삼합을 사 오게 했다. 어떤 삼합보다도 맛있다. 음식상은 말 그대로 진수성찬이다. 샐러드, 멘보샤, 가자미 식해, 붕장어 회, 개불, 삼합, 파김치 말이, 스테이크, 전복 미역국 등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 화수분 같은 생일상이다. 샴페인으로 시작해서 와인을 마시고, 맥주로 마무리를 했다. 네 명은 와인을 각 1병씩 해치우고도 아쉬움이 남는다. 나이와 주량은 결코 반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서 뿌듯하다. 그럼에도 76은 준비한 음식이 모두 나오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하며 파티를 마치고 나올 때 호박 수프를 나눠주었다. 다정도 병이라더니, 정이 넘친다.

죄측부터 76, 73, 79, 77

  73은 BTS에 빠져 살고 있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데, 우연한 기회에 BTS의 노래를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BTS의 노래를 들으며 울음을 흘릴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말랑말랑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꼰대가 되고, 자기 고집이 세지면서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눈물샘은 마르고, 감정의 문을 닫고, 귀도 닫으며 입만 열고 사는 것이 일반적인 노년의 삶이다. 73은 그런 면에서 아주 독특한 사람이다. 눈물샘은 터졌고, 감정의 문은 점점 더 활짝 열리고 있으며, 귀는 더욱 얇아지고, 입은 조금씩 닫아가고 있다. 자신의 벽을 허물고 사람, 자연, 주변의 환경과 하나가 되기 위해 요즘도 마음공부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어린애가 되어 가고 있다. 그 모습이 귀엽다.

 

 76은 아직도 현역으로 IT 회사 CEO로 활동하고 있다. 여러 번 회사 업무 내용을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한두 달 전에 프로젝트를 수주했다고 해서 막걸리 마시며 축하했었다. 나의 관심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고, 얼마를 벌을 수 있냐는 무지하게 세속적인 질문이었다. 지금 프로젝트는 잘 진행되고 있지만, 가끔은 프로젝트 진행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워낙 매사 완벽하게 마무리를 하는 성격이고, 조금이라도 더 잘하려는 욕심이 있는 사람이다. 발주처는 봉 잡은 것이고, 프로젝트 완수를 위한 76과 직원들은 그만큼 고생을 해야만 한다. 음식상 준비하는 것만 봐도 성격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봉 잡았고, 정작 76은 음식 준비로 고생을 한다. 그러면서 음식 준비해서 누군가에게 대접하는 일이 즐겁다고 한다. 76은 그런 사람이다. 79가 붕장어 회를 좋아한다며 먹는 모습을 보고 기분 좋아하는 사람이다. 

73의 천진난만한 모습

79는 아카이브다. 아카이브의 사전적 의미는 ‘소장품이나 자료 등을 디지털화하여 한데 모아서 관리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손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모아 둔 파일’이다. 기억력이 아주 뛰어난 79는 과거 기억을 소환시켜 우리들을 시간여행시켜준다. 서클에서 매년 진행했던 과거 summer camp를 얘기하며 붕장어 회 관련 추억을 소환시켜 주었다. 이 추억이 도화선이 되어 73은 영어 연극하며 대상 받았던 추억을 되새겼고, 76은 서클의 전설로 활동하며 79의 회장 선거 supporting speech를 했던 추억을 소환시켰다. 77도 자랑하고 싶은 얘기도 있었지만, 밤샐 것 같아 아쉬움을 뒤로하고 겨우 참아낼 수 있었다. 79는 과거의 샴페인 오스카도 떠오르게 만들어 주었다. 또한 우리들의 뒤풀이 장소인 시골집에서 마셨던 소주+환타/오란씨 등을 섞어 마셨던 앞서 나간 소주 칵테일 얘기를 이어갔다. 술 얘기는 술로 끝나지 않고, 그 당시의 여러 추억을 불러들였다.

 

 77은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생일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집에서 76집까지 한낮에 두 시간 정도 걸어서 갔다. 추석 이후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 위한 준비로 큰 배낭에 들고 갈 짐을 모두 넣고 메고 걸었다. 배낭과 무게에 익숙하기 위한 연습이다. 그리고 76 집에서 마치 내 집에 온 듯이 당당하게 샤워를 한 후에 준비해 간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파티에 참석했다. 남의 집에서 샤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만큼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세월이 이런 편안함을 만들어 준다. 가끔은 73에게 소극적인 반항을 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 조차도 즐거운 놀이다.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투정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은 나이 들어 좋은 일이다. 투정을 하고 받아줄 사람이 있고, 때로는 남의 투정을 들어주는 것도 나이 들어가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가끔 73의 변한 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그 놀라움을 장난 삼아 표현한다. 73은 77의 놀라움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화답을 한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76과 79는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2월은 76의 생일이 있는 달이다. 예전만큼 자주 만날 수 없겠지만, 앞으로 매년 2월과 8월 모임은 지속될 것이다. 기분 좋은 77은 내년 2월에 76이 좋아하는 와인 한 박스를 선물하겠다고 공언했다. 77의 도발에 73은 겉으로는 잠자코 있었지만, 77보다 훨씬 멋진 선물을 준비할 것이다. 73이 갖고 있는 자존심은 77의 그런 도발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또한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멋진 놀이다. 그런 쓸데없는 도발과 대응은 삶의 활력이 되고, 그런 유치한 장난은 우리를 더욱 어린애로 만들어 준다. 나이 들어가면서 굳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욱 부드러워지고 마음을 열고 산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앞으로 유치한 장난은 계속될 것이고, 그 장난을 치며 우리는 웃고 떠들며 지낼 것이다. 73, 76, 77, 79 모두 건강하게 지내며 이 모임을 잘 유지해 나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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