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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천리길

장모님과 함께 걸은 인제천리길

by 걷고 2025. 5. 10.

장모님을 모시고 2박 3일간 여행을 다녀왔다. 송해 공원에서 휠체어를 빌려 장모님을 모시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순간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보며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니!”라고 한탄 섞인 말씀을 하시며 울음을 터뜨리신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내도 억지로 울음을 참으며 장모님을 위로해 드린다. 이 장면이 마음 한편에 박혀있다. 당분간 쉽게 잊을 수 없을 거 같다. 단순한 노화 현상에 불과하지만 당신께서는 스스로 받아들이시기 쉽지 않으셨나 보다. 노화와 죽음, 질병을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스위스 출신의 미국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Elisabeth Kubler-Ross)는 죽음을 인정하는  5가지 단계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 단계를 거친다는 이론이다. 장모님의 모습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정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장모님 모습을 보며 나의 미래 모습을 본다. 나도 언젠가는 장모님의 모습을 따라갈 것이다. 허리 곧게 펴고 걷다가, 허리가 구부러지고, 보속은 느려지고, 보폭도 줄어들고, 지팡이에 의지하거나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나 스스로도 나의 노화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열심히 걸으며 노화를 가능하면 연기하고 싶다. 노화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조금이라도 독립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가능하면 죽기 전까지 나 스스로 몸을 움직이며 살아가고 싶다.     

 

여행을 다녀와서 조금 피곤했지만, 인제천리길을 걸으러 나간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피곤해서 집에서 쉰다면 몸은 편해질 수 있겠지만, 체력은 약해질 수도 있다. 몸은 비록 피곤하지만 노화를 연기하기 위해서라도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집을 나섰다. 몸의 요구를 따르느냐 아니면 그 요구를 무시하고 주인의 삶을 위한 결정을 내릴 것인가는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몸의 요구를 무시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빗속을 걸었다. 길벗을 만나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웃고 걸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다리 근육이 뻐근하다. 뻐근함이 몸의 피곤을 인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잘 움직였다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이런 뻐근함은 다음 길을 걸을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만들어준다.      

 

아침부터 걷기 마칠 때까지 비는 그칠 줄 모른다. 바람도 거세게 불고 날씨는 제법 쌀쌀해서 손이 시릴 정도다. 오늘 걸은 길은 한석산하루 고갯길이다. 이 길은 인제천리길에서는 보부상의 길 시작점이다. 보부상은 이 산을 넘나들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 이 길을 걷는다. 같은 길을 걸어도 목적이 다르다. 가장의 책임이 날씨와 무관하듯, 심신의 건강 역시 날씨와 무관하다. “하우고개는 옛날에 두 사람이 싸우고 원님에게 소송하러 가다가 이 인제천리길 고개에서 화해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제천리길 코스북 인용) 우리는 이 길을 걸으며 내내 웃고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굳이 화해할 일도 없다. 그래서 이 길을 걸으며 마음과 발걸음이 가벼울 수 있었다.      

 

길을 걷는데 장모님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편하게 전화할 친구가 두 명 밖에 없다.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 나도 가야 하는데 이렇게 살아있네.” 이 말씀 덕분에 오늘 길벗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예전과는 조금 달랐던 거 같다. 죽음 앞에 부귀영화, 권력, 야망, 미움과 사랑 등 우리가 삶에서 추구해 왔던 모든 것은 힘을 잃어버린다. 친구와의 불화나 갈등 역시 무의미하다. 오히려 불화와 갈등이 더욱 그립고 그런 상대가 있다는 사실조차 무척 행복할 수도 있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길벗 모두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이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걷기 동호회 중에, 길 중에, 날 중에, 오늘 만나 함께 걸은 모든 길벗과의 인연은 무척 희귀하고 소중하다. 오늘 함께 걸은 모든 길벗 한분 한분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믿음직스럽다. 이런 감정과 생각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분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의 변화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걸은 인제천리길 9코스는 잊지 못할 길이고, 오늘 만난 길벗 역시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이다. 장모님과의 여행 덕분이다. 그 여행의 여파가 나의 삶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 파문은 한쪽은 슬프고 안타깝지만, 다른 한쪽은 삶과 사람을 대하는 나의 모습에 변화를 어느 정도 만들어 주었다. 오늘 길을 걸으며 내내 장모님과의 여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조금은 변화된 모습으로 대하며 즐겁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오늘 마음에 장모님을 모시고 함께 걸었다.      

 

길벗 한 명이 단체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었다. 우비의 색상이 다양하고 표정은 모두 밝게 웃고 있다. 활기찬 모습도 느껴지고 기뻐하는 모습도 느낄 수 있다. 비 오는 날 이 길을 걸으며 웃고 있는 우리가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정상의 정의가 다르기에 우리는 매우 건강하고 정상인 사람들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각자 다른 색상의 우비를 입었듯, 각자 생각과 살아온 삶의 모습이 다르다. 하지만 길 위에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하며 하나가 되어 걷는다. 때로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감추기도 하고, 때로는 표현을 하지 않고 견디기도 하고, 하나라는 전체를 위해 기꺼이 포기할 줄도 아는 지혜를 지닌 우리들이다. 그리고 걷기가 끝나면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거나 아니면 길에서 배운 지혜를 통해 변화된 자신을 만나기도 한다. 변화를 수용하고, 삶을 수용하고, 죽음의 과정을 수용하며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기 위해 오늘도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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