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내린 비로 북한산은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들려오는 작은 계곡의 물소리가 새소리만큼 아름답습니다. 예전에는 집 앞 도랑에도 물이 흐르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북한산 계곡에도 바위만 쓸쓸히 놓여있는 삭막함을 보며 저 자신 또한 삭막해짐을 느낍니다. 오랜만에 물과 바위가 만나 즐겁게 장난치고 있는 모습과 소리를 보며 자연과 장난치며 걷습니다. 어느 책에선가 마음공부는 친밀함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마음공부는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 친밀함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물과 바위가 친밀해져서 하나의 계곡을 이룹니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리는 자연과 친밀해지며 하나가 되어 갑니다.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며 우리가 되어갑니다. 안과 밖, 좋음과 싫음, 사랑과 미움, 주체와 객체, 이것과 저것은 이분법적 사고로 인해 만들어진 상대개념입니다. 하지만 이 경계가 무너지면 아름다운 하나가 됩니다. 철창 안에 있는 사람이 밖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겁니다. “누가 철창 안에 있고, 누가 철창 밖에 있는가?” 그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오직 철창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안과 밖은 자신의 기준으로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걸을 때 마음을 발바닥에 두세요. 발이 대지에 키스할 때, 마음도 대지에 키스를 합니다.” <틱낫한의 걷기 명상>이라는 책에 나온 글입니다. 발이 대지에 키스하는 마음으로 걷는다면 우리는 이미 최고의 걷기 명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를 할 때 온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키스를 합니다. 키스하는 과정의 모든 것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기 위해 온 마음을 기울입니다. 키스하기 전의 설렘과 기대감, 키스하며 느끼는 전율과 사랑, 키스 후 느껴지는 키스에 대한 갈증과 욕구, 키스 후 며칠 내내 떠오르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키스의 느낌 등을 간직하며 다음 키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키스를 통해 친밀함을 확인하며 둘이 하나가 되어갑니다. 키스하는 마음에는 너와 나의 분리된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다면 우리는 이미 자연과 친밀함을 느끼며 하나가 되어가게 됩니다. 게다가 지금 이 키스가 세상의 첫 번째 키스라면 또는 마지막 키스라면 얼마나 그 키스가 간절하고 소중하겠습니까? 지금 걷는 이 걸음이 자연과의 첫 번째 키스라면 또는 이 생의 마지막 키스라면 지금 느끼는 모든 감각을 간직하기 위해 얼마나 정성을 들여 걷겠습니까?
이 생의 첫 번 째 발걸음이거나 마지막 발걸음이라는 마음으로 길을 걷는다면 길과 자신은 하나가 됩니다. 길과 자신은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길과 길을 걷는 몸 사이에 ‘나’라는 개념이 끼어들 공간이 없습니다. 걷고는 있지만 걷는 몸만 있을 뿐, 걷는 주체인 ‘자기’는 없습니다. ‘나’가 사라진 자리에 자연과 오직 걷고 있는 몸만 있을 뿐입니다. 몸은 경험하고 느끼는 감각입니다. ‘나’는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함께 걷는 길벗과 나 역시 하나가 됩니다. 걷는 몸은 ‘나’라는 개념이 없기에 자연과 하나가 되듯, 길을 걸으며 ‘나’가 사라진 자리에 ‘너’역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길벗은 모두 하나가 됩니다. 여러 명이 북한산을 걷고 있지만 북한산과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북한산을 걸으며 하나가 되는 우리를 느낍니다.
곧 출산을 앞둔 딸에 대한 걱정과 손자를 볼 기대를 갖고 있는 길벗이 있습니다. 산모의 건강과 아이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오랫동안 집안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온 길벗이 있습니다. 가정 내 자신의 역할을 조금 내려놓으며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한 날개 짓을 합니다. 그 익숙하지 않은 날개 짓이 아름답습니다. 그의 멋진 여정을 응원합니다. 티베트 여행을 다녀온 경험담을 얘기하며 티베트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된 길벗이 있습니다. 모든 것에 진심인 그의 아름다운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누군가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공감을 잘하는 아름다운 길벗도 있습니다. 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멋진 길벗입니다. 그 노력과 정성을 자신에게도 조금씩 베풀며 자신을 채우는 길벗이 되길 응원합니다. 일반적인 시각과 다른 시각을 지니며 대화를 활기차게 만드는 멋진 길벗도 있습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닙니다. 그 길벗의 ‘다름’을 존중하며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이 멋진 길벗들과 자연을 함께 걸으며 배우고 이들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걷고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낯선 사람이 친밀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은 참 단순하고 쉽습니다. 그냥 만나서 길을 걸으면 됩니다. 굳이 얘기를 나누지 않고 함께 걷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대화는 논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즉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가끔은 대화가 필요 없이 그냥 옆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위안과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침묵 속에 걸으며 자신이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가고, 길벗을 위한 기도의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낯선 사람과 친밀한 사람은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시간과 경험이 필요할 뿐입니다. 시간을 함께 지내고 경험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를 하며 친밀함이 더해갑니다. 친밀함은 너와 나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하나가 되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도 시간과 경험을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으니까요. 자신만을 위한 온전한 시간을 누리고 자신만의 경험을 온전히 할 수 좋은 방법이 자연을 걷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대지와 키스하는 마음으로 대지를 온전히 느끼며 걷는다면 멋진 경험과 시간이 될 것입니다.
식당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얘기를 이어갑니다. 할 얘기도 많고, 들을 얘기도 많습니다. 다만 시간이 짧은 것이 아쉬울 따름이지요. 집중해서 길벗의 얘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속내도 털어놓습니다. 나의 경험이 그대의 경험이 됩니다. 얘기를 통해 길벗에 대한 이해가 깊어집니다. 이해를 하게 되면 오해는 사라집니다. 이해는 하나가 되는 과정이고, 오해는 둘로 나누어지는 과정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언행을 할 때 그의 살아온 과정을 이해한다면 그의 언행에 대해 비난과 비판 대신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이해는 친밀감을 만들어내고, 친밀감은 하나가 되어가는 무척 중요한 과정입니다. 길을 걸으며 때로는 침묵 속에서 자신과 대화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즐거운 대화를 길벗과 나누기도 합니다.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식구가 되어갑니다.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이해하듯 길벗도 이해하게 되니까요.
집에 돌아와 쉽게 잠에 들지 못했습니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금요 걷기 덕분에 한 주를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걷기 마친 후 시원한 맥주를 마시기 위해 일주일간 금주를 합니다. 금요일에 웃기 위해 한 주를 심각(?)하게 보냅니다. 금요일에 대화를 하기 위해 한 주를 조용히 살아갑니다. 그리고 금요 걷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일주일 동안 조용히 지냈던 모습에 활기가 가득하며 심하게 각성된 자신을 발견합니다. 만남이 즐겁고, 걷기가 설레고, 다음 걷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쉽게 진정이 되지 않습니다. 누워서 호흡에 집중하고 몸의 감각을 느끼려 해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둡니다. 그리고 어제의 만남을 되새김질하며 이 글을 씁니다. 덕분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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