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파랑길

야생성 회복의 방법

by 걷고 2024. 4. 4.

과연 야생성 회복이란 무엇일까? 잊고 있던 자신을 되찾는 것이다. 그럼 자신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 감정, 소유물을 자신이라고 한다. 이런 것들이 자신이라면 또 자기 것이라면 자신이 마음껏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것임에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뿐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해 힘이 들고, 때로는 그들이 자신의 주인 역할을 하고 있다. 자신의 소유물인 자신의 것이 자신의 주인이 되는 이상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 것임에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오히려 그것들이 우리를 부리고 있다. 우리가 부림을 당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들의 종이 되고 노예가 된다. 즉 자유가 사라진다. 자신의 삶을 위해 또 행복을 위해 노력해서 얻는 모든 것들이 우리를 불편하고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야생성의 회복이란 자신이 주인임을 인식하고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노예나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고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럼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가? 또 어떻게 자유로워져야 하는가? 요즘 읽고 있는 책 <붓다의 호흡법, 아나빠나삿띠>에 그 답이 나온다. 

 

“어떻게 마음이 자유로워지는가? 마음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가? 마음을 마음속에 일어난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무명에서 유래하는 집착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중략) 무상을 보게 되면 어떤 것이 영원하다는 인식으로부터 마음은 해방된다. 본질적인 고(苦)를 볼 때마다 바로 그 순간 거기에서 행복이라는 잘못된 인식으로부터 마음은 해방된다. 무아(無我)를 철견할 때마다 바로 그 순간 거기에서 자아가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마음은 해방된다.”  (본문 중)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것의 정체는 바로 무지(無知)다. 무지란 아는 것이 부족하거나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존재의 실상인 삼법인, 즉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무지하기에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착각하고, 몸을 지닌 인간의 삶 자체가 고(苦)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행복을 구하려 불나방이 되어 불 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무아를 이해 못 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소유물을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그것들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삼법인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이해를 통해 마음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마음이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가? 즉 마음은 번뇌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다시 말하면, 마음은 탐욕, 증오 또는 분노, 어리석음, 자만, 그릇된 견해, 의심, 나태와 무기력, 불안, 양심 없음, 두려움 없음 등으로부터 해방된다. (중략) 그러면 이제 어떤 방법으로 이 모든 번뇌들을 제거할 수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수행자는 다양한 방법으로 수행하여 번뇌들을 제거하여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중략) 숨을 내쉬고 숨을 들이쉬는 동안 빈틈없이 알아차림 한다면, 호흡을 하는 동안 수행자는 번뇌로부터 마음은 자유로워진다. ” (본문 중)

 

이 책은 아나빠나삿띠, 즉 들숨 날숨에 마음 챙기는 호흡 수행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은 책이다. 이 책은 앞으로 나의 수행 길잡이와 스승이 되어 줄 것이다. 호흡이 없으면 죽는다. 호흡이 생기면 살아난다. 호흡은 바로 우리 몸이자 생명이다. 또 다른 몸은 몸의 감각이다. 몸의 감각을 느끼고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외부 자극에 반응하며 살아간다. 감각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몸과 시신이 된 몸과는 같은 몸이지만 다른 몸이다. 시신도 몸의 모든 감각기관을 갖고 있지만 호흡을 할 수 없고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숨이 즉 호흡이 살아있어야만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호흡과 감각은 한 몸이고, 이 둘은 바로 우리 몸이다. 호흡을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는 몸의 감각을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해파랑길을 걸으며 야생성, 즉 자유를 되찾고 싶다는 글을 어제 썼다. 자유를 되찾고 싶다는 의미는 종이나 노예의 삶, 우리에 갇힌 삶에서 벗어나 활활 발발하게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는 의미다. 수행자가 되어 평생 선방에서 화두 참선을 하거나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는 없지만, 일상 속에서 호흡 명상을 하며 호흡을 통해 자유를 되찾고 싶고, 길을 걸으며 몸의 감각을 통해 자유를 되찾고 싶다. 따라서 내게 걷기는 noble practice이다. Noble practice를 위해서는 noble silence가 필수적이다. 침묵을 유지하며 걸어야 호흡과 몸의 감각을 느끼며 걸을 수 있다. 해파랑길을 걸으며 오전과 오후에 최소한 각각 30분 정도의 noble silence 속에서 걸을 계획이다. 혼자 걸을 때에는 자연스럽게 침묵 속에서 걷게 되지만, 함께 걸을 때에는 의식적으로 침묵 시간을 만들고, 침묵 걷기를 하겠다는 마음을 확립하고, 침묵 속에서 걸을 필요가 있다. 

 

고엥카 수행센터의 한국 분원인 ‘담마코리아 위파사나 명상센터’에서 10박 11일간 집중수행을 했던 적이 있다. 그 안에서 철저하게 지켜지는 것이 noble silence다. 등록한 직후부터 바로 10일 내내 침묵을 유지하며 집중수행을 한다. 마지막 날 즉 11일째 침묵을 풀게 되는데 그때부터 명상 센터는 매우 소란스러운 난장이 되어버린다. 마지막 날에 침묵을 해제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어쩌면 침묵 수행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이 글을 쓰며 떠오른다. 

 

요즘 호흡명상을 할 때 한 호흡 한 호흡 정성을 다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잘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호흡에 목숨이 달려있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좌정 명상이 끝난 후에도 일상 속에서 호흡 접촉점을 의식하려 노력하고 있다. 가능하면 호흡이 나의 의식에서 떨어지지 않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의식과 상관없이 호흡은 저절로 진행되고 있지만, 그 호흡을 인식하고 못하고는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인식하는 순간 다른 번뇌는 사라지고. 안식하지 못하는 순간 그 틈을 이용해서 번뇌가 침투해 온다. 걸으며 몸의 감각을 느끼며 걷는다. 몸의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 역시 번뇌는 쳐들어 온다. 번뇌를 물리치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호흡과 몸의 감각을 늘 느끼며 지내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선사들이 일주일 내내 화두를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 같다. 

 

걷기는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호흡과 몸의 감각을 느끼며 걸으면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반면 일상의 습관과 태도를 유지하고 걸으면 오히려 더 강화시켜 자신의 성을 더 높고 두껍게 쌓는다. 즉 자기가 만든 감옥을 더욱 힘든 세상으로 만들어 간다. 걷기는 자신이 만든 성을 부수는 행위다. 자신의 성을 부수면 온 세상과 하나가 된다. 너와 나의 구별이 사라지고 모든 존재에 대한 차별이 사라진다. 차별은 집착과 혐오를 만들어낸다. 이 두 가지로부터 벗어나면 야생성, 즉 자유를 되찾게 된다. 

 

至道無難 唯嫌揀擇(지도무난 유혐간택)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但莫憎愛 洞然明白(단막증애 통연명백)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신심명 (信心銘)에 나오는 말씀이다. 야생성 즉 자유를 되찾는다는 것은 결국 이 두 문장을 체득하기 위함이다. 아나빠나삿띠를 수행하는 목적도 결국 이 두 문장을 얻기 위함이다. 이 두 문장이 바로 내가 스스로 만든 감옥을 여는 열쇠다. 그 열쇠를 얻기 위해 호흡과 몸의 감각을 느끼며 걷고 또 걷는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