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걸었던 길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길이 있다. 나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길이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인생 2막 방향을 어느 정도 구체화 할 수 있었다. 서울 둘레길을 걸으며 삶의 과제를 잘 해낼 수 있다는 자기 효능감을 키울 수 있었다. 경기 둘레길을 걸으며 걷는 이유를 찾게 되었다. 오랫동안 왜 걷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며 걸었다. 경기 둘레길을 완보한 후 내린 결론은 ‘자유’를 찾고 싶어 걷는다는 것이다. 나를 구속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가정의 가장이자 구성원으로 책임과 의무를 늘 안고 살아간다.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삶의 모습이다. 가정과 가족이 안정감을 주고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가정을 지키고 가족의 안녕을 위한 부담은 작다고만 할 수는 없다. 사회 구성원으로 적응하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 가끔 자신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참 자아’는 사라지고, 가면을 쓴 사람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회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기도 한다.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기’와 ‘참 자아’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신 내부의 갈등도 삶의 큰 구속이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참 자아’를 아예 잊고 살아가기도 한다. 나를 구속하고 있는 것들, 즉 나, 가정, 사회는 동시에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아이러니다. 살아가는 원동력이고 주인이면서, 동시에 나를 구속하고 힘들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해파랑길을 시작하며 왜 이 길을 걷고 싶은지 자문해 본다. 무엇보다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걸을 생각만 해도 얼굴에 웃음이 떠오르고 활력이 되살아난다. 왜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좋다. 길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집을 나서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렌다. 물론 걸으며 느낄 수 있는 고통과 고생을 생각하면 집에 머물고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걷는다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만큼 걷는 것이 좋다.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자유를 찾기 위해 걷는다는 것이다. 언젠가 참 자유를 찾는 순간까지 이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려야 한다. ‘자기’라고 생각했던 작은 자아를 벗어던져야 한다. 일상에서 익숙한 자신의 습관과 태도도 버려야 한다. 지금의 자기를 죽이고 새로운 자기로 태어나야 한다. 자기를 죽이는 작업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작은 변화를 힘들게 만들었다고 해도 금방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일종의 관성이다. 그간 살아온 힘의 방향, 생각의 관성, 마음 근육의 발달 등이 자신을 지켜온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참 자아’를 만나는 데 방해 요인이 되기도 한다. 참 자기를 만나기 위해서 어떤 모습을 버리고, 어떤 모습을 되찾아야 할까?
‘야생성’의 회복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 갇힌 야생동물은 야생성을 잃어간다. 굳이 먹이를 찾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고, 생존을 위한 긴장감을 유지할 필요도 없다. 편안하게 음식이 제공되고, 안락한 거주 공간이 제공되는 동물원의 야생동물은 점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동시에 야생성도 잃어버린다. 사자의 모습은 지니고 있지만, 사자의 본성은 잃어버린 종이 사자가 되어버린다. 지금 나의 삶이 야생성을 잃어버린 종이 동물과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우리 안의 동물은 안락함에 빠져 자신의 야생성, 즉 천성과 본성을 잊고 또 잃어버리며 살아간다. 나 역시 몸과 마음의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고, 가능하면 무탈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야생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삶의 긴장감이 사라지고, 대신 걱정거리도 되지 않는 아주 사소한 걱정거리로 끙끙거리고, 사소한 외부 자극을 크게 받아들이며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작은 일을 크게 해석해서 자신을 못살게 굴고, 몸의 사소한 불편함을 견디기 어려워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은근히 기대하고, 기대가 어긋나면 화를 내며 살아가고 있다.
야생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이유는 ‘코리아 둘레길’을 걷고 싶으면서 동시에 그 힘든 여정을 꼭 해야만 하는가라는 유혹 때문이다. 길과 걷기를 좋아하면서도 예상되는 힘든 상황으로 인해 자신 안에 움츠려 들고 편안함과 안락함 만을 추구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그런 모습에서 탈피하고 싶다는 반작용이 동시에 떠오른다. 야생성은 거친 모습을 의미하지 않는다. 원래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 야생성이고, 자신의 원래 모습을 되찾는 것이 야생성의 회복이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주변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 야생성이다. 즉 한 인간으로서 또 동물로서 자신의 본분을 유지하며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안락함의 추구는 욕심이다. 좀 더 편안한 곳에서 자고, 좀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해야만 하는 하기 싫은 일은 안 하고, 남을 자신의 도구로 악용하고, 좀 더 높고 안정된 권력과 위치를 지키기 위해 욕심을 내며 살아가는 것이 야생성의 실종이며 이는 본성에 반하는 일이다. 요즘 선거를 앞두고 일부 후보자들의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린 이유도 바로 그들이 야생성을 잊고, 길들여진 삶의 모습으로만 살려고 하는 욕심 때문이다. 일단 길들여지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나 역시 지금의 안락함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 그것은 그만큼 길들여져 있다는 반증이다. 길들여진 만큼 야생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즉 나의 본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야생성을 되찾아야 나를 가둔 우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또한 일단 야생성을 회복하게 되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라는 틀에 갇히지 않게 된다. 어느 곳에 있든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즉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 내가 코리아둘레길을 걷는 이유는 야생성의 회복, 즉 수처작주의 삶을 살기 위해서다. 참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싶어서 이 길을 걷는 것이다. 야생성의 회복은 참 자유인이 되는 길이고, 이 길 위에 서면 수처작주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코리아 둘레길 4개 구간 중 먼저 해파랑길부터 시작할 계획이다. 두 가지 안으로 고민 중에 있다. ‘목-토’ 또는 ‘금-일’ 중 일정을 고민하고 있다. 딸네에서 ‘월-목’까지 머물며 손자들 일을 도와주고 있는데, 아내와 딸이 허락하면 가능하면 ‘목-토’로 일정을 정하고 싶다. 숙소 예약도 조금 더 수월하고, 길도 많이 번잡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일요일은 집안에서 가족과 함께 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요일이 확정되면 가능하면 매월 같은 주 즉 마지막 주 또는 넷째 주로 일단 확정하고 상황에 따라 변경할 계획이다. ‘걷고의 걷기 학교’에 공지를 올려 진행할 계획이다. 드디어 시작이다. 벌써부터 설렌다. 집을 벗어나는 것은 마음의 우리를 벗어나는 일이다. 나의 야생성을 찾아 걷고 또 걷고 싶다. 언제 찾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걷다 보면 언젠가는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걷고 또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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