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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둘레길

경기 둘레길 완보증

by 걷고 2023. 8. 28.

며칠 전 경기 둘레길 완보증과 기념품을 받았다. 1년 3개월 간 겯기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걸은 최종 결과물이 도착했다. 택배로 도착한다는 메시지를 받고 괜히 설레고 빨리 귀가해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산티아고 순례 완보증을 받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대성당에 가까워지면서 사람들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왼쪽에는 이미 완보증을 받은 사람들이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천천히 걸어오는 반면에 완보증을 받으러 가는 사람들은 어딘가 초조하고 발걸음이 바빠진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괜히 마음이 바쁘다. 드디어 순례 완보증을 받은 이후에는 여유와 평화가 찾아온다. 경기 둘레길 완보증을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이 예전 기억을 소환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성급하게 뜯어본다. 급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완보증과 기념품이 들어있다. 기념품은 경기 둘레길 표시가 있는 네 가지 캐릭터 상품과 은화 같은 동전이 들어있다. 인증번호가 0515인 것으로 보아 아마 515번째로 이 길을 완주한 것 같다. 동전 뒷면에도 0515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걷는 내내 스탬프를 찍었던 수첩(passport)에 ‘경기 둘레길’이라는 글씨가 펀칭되어 있다. 완보를 인증한다는 표시 같다. 아내도 무척 기뻐했고, 나 역시 무척 기뻤다. 그리고 함께 걸었던 길동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경기 둘레길이 드디어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 수첩을 보니 발행일 날에 20121. 12. 30이라는 날짜가 쓰여 있다. 2121년 12월 30일에 받은 후 2022년 5월부터 걷기 시작해서 2023년 8월에 완보했다. 860km라는 거리를 완보하기 위해서는 준비 기간도 필요하고, 오랜 기간 걸어야 하고, 꾸준히 걸어야 한다.

 

거실에 완보증과 기념품을 펼쳐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이어서 산티아고 수첩, 완보증과 서울 둘레길 완보증을 함께 펼쳐놓고 다시 사진을 찍었다. 산티아고를 제일 먼저 걸었고, 이어서 서울 둘레길을 걸었고, 마지막으로 경기 둘레길을 걸었다. 산티아고 920km, 서울 둘레길 157km, 경기 둘레길 860km를 걸었다. 요령 피우지 않고 너무 고지식하게 오직 내 두 발로 어깨에는 배낭을 메고 걸었다. 혼자 걸을 때도 있었고, 함께 걸을 때도 있었다.

이 길을 걸으며 무엇을 느꼈고, 어떤 생각을 하며 걸었는지 돌이켜본다. 산티아고 순례는 환갑 기념 여행이었다. 사업을 정리한 후 앞으로 살아갈 길을 모색하는 인생 2막 설계를 위한 작업이었다. 여정의 반 이상은 지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었고, 남은 시간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구상하며 걸었다. 물론 걷는 중간에 모든 생각이 저절로 떨어져나가는 경험을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했었다. 잊지 못할 기억이다. 성당에서 세족식을 했던 경험도 귀한 경험이었다. 여전히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확실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윤곽이 보여서 다행이다. 특히 산티아고 순례 후 발간한 책,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길, 산티아고’는 지난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방법에 대한 정리를 한 책으로 자신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책이다. 산티아고를 걸으며 과거를 반성하고, 잘못을 참회하고, 앞으로의 삶은 나누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지금 그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가며 살아가고 있다.

 

서울 둘레길을 걸으며 자기 효능감을 갖게 되었다. ‘자기 효능감’이라는 어떤 과제가 주어져도 해 낼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평가이다. 길 안내를 하기 위해 혼자 이 길을 걸었다. 중간중간 헤매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완보를 했고, 완보증도 받고, 서울 둘레길 안내 센터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이 길을 걷기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걷기 위해 길 안내자로 나서며 다시 걸었다. 길눈이 어두운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어떻든 함께 마무리를 두 번이나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어진 과제가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내게 서울 둘레길은 ‘자기 효능감’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경기 둘레길을 걸으며 두 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가장 큰 것은 ‘왜 걷는가?’에 대한 대답을 찾은 것이다. 걷는 이유는 나 자신을 찾기 위해서이고, 나 자신을 찾는 이유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서이다. 자유란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과 같은 의미다. 어디에 서 있든 주인으로 살아가고, 주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온 세상이 진리의 세상이 된다는 뜻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마음이 조금 단단해졌다는 것이다. 예전에 비해 외부 환경에 끌려 다니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바위와 같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갖게 된 것이다. 산티아고 길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찾았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기효능감을 서울 둘레길을 걸으며 갖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 둘레길을 걸으며 걷는 이유를 알게 되었고, 걸으며 조금씩 단단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장거리 트레킹은 힘든 만큼 보상이 따라온다. 누가 보상을 해 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보상을 만들어준다. 건강은 부수적인 보상일 뿐이다. 무릎 수술을 한 후 걷기동호회에서 활동한 지 12년이 되어간다. 많은 길을 걸었고, 길 안내자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길 위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길은 말이 없지만, 침묵의 언어로 길을 가르쳐준다. 다만 스스로 질문을 갖고 걸어야 그에 맞는 답변을 가르쳐준다. 사람마다 걷는 이유가 각양각색이다. 또 반드시 어떤 이유를 갖고 걸을 필요도 물론 없다. 하지만, 내게 걷기는 단순히 몸의 건강을 위해 걷거나, 배지를 받기 위해 걷거나, 완보증을 받기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니다. 물론 건강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까에 대한 고민을 늘 안고 걸었다. 왜 걷는가에 대한 질문은 화두가 되었다. 그리고 조금씩 나의 실체와 화두에 대한 답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분간 조용히 걸으며 나 자신을 찾는 일에 집중할 생각이다.

스님들은 안거증을 고이 간직한다. 동안거와 하안거를 어디서 몇 번 보냈느냐가 스님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살림살이다. 스님들에게 안거증이 있다면 내게는 완보증이 있다. 안거 기간 동안 내내 잡념 속에 빠져있다면 무의미한 안거가 되듯이, 걸으며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면 이 또한 무의미한 일이 된다. 그만큼 내게 걷기는 단순한 신체활동이 아니다. 스님들이 화두와 함께 살듯이, 나는 화두를 안고 걷는다. 스님들에게 안거증이 살림살이이듯이, 내게는 완보증이 살림살이다. 수행자의 목표는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 나의 목표는 걷기를 통해 자신을 찾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찾고 삶 속에서 평온함을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나의 닉네임이 ‘걷고’인 이유는 걷고 또 걸으며 자신의 주인을 찾고, 주변 사람들에게 걷기를 통한 삶의 행복을 나누는 일을 하라는 의미다. ‘걷고’는 완료형이 아니고 진행형이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위해 나는 오늘도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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