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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둘레길

걷기,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by 걷고 2023. 8. 9.

사업을 정리하고 무릎 수술을 한 후에 처음 시작한 일이 걷기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뛰거나 등산을 하는 것도 무리여서 뭘 할까 고민하다 찾은 방편이다. 무력감에 빠져 있었고, 자존감도 낮아졌고, 신체 활동에 대한 자신감도 떨어진 상태였지만 뭔가를 해야만 했다. 경제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힘들었고, 신체적으로도 활동 제한이 있었고, 겁도 많고 소심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우선 몸을 움직이며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마음이 불안정하고, 정신이 산만하고, 아침에 기상하면 할 일도 없는 막막한 상태에서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음이 힘들어할 때 몸을 움직이면 마음도 활기를 되찾게 된다는 것을  한참 걸은 후에 알게 되었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뿌리가 죽어갈 때, 나뭇잎에 수분과 양분을 제공하면 뿌리도 활력을 되찾는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걷기 동호회를 검색해서 활동을 하기 시작한 지 벌써 12년이 지나간다. 누군가가 왜 나왔느냐고 처음 나온 내게 물었다. “산티아고 가고 싶어서요.” 무심코 나온 얘기다. 그 당시 후배가 산티아고 책을 선물해 주었고, 그 책을 막 읽고 난 이후여서 그런 대답을 한 것 같다. 생각을 하고 한 얘기도 아니었고,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 대답이다. 그리고 그 말이 예언이 되어 2017년도에 환갑을 맞이해서 산티아고 길을 다녀왔다. 생장에서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800km, 대성당에서 피니스테레까지 90km, 피니스테레에서 묵시아까지 30km, 총 920km를 단 1m도 빼먹지 않고 어깨에 배낭을 짊어지고 두 발로 걸었다.     

 

 걷기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다른 회원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다니기도 했고, 길 안내자로 나서서 길을 찾은 후 함께 걷기도 했다. 특히 ‘수요 저녁 침묵 걷기’ 안내자로 활동했는데, 이는 매주 수요일 저녁에 약 두 시간을 걷는 도중에 30분간 침묵 속에서 걷고, 걷기 마친 후에 ‘종소리 명상’ 시간을 갖는 프로그램이다. 가끔 회원들이 그때 기억이 좋았다고 얘기하며 그 프로그램이 없어진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서울 둘레길도 길 안내자로 두 번 회원들과 함께 걸었고, 그 외에도 평일 저녁 걷기를 오랫동안 안내하기도 했다. 걷기를 통해 힘든 시간을 극복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심신이 지친 사람들에게 함께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불교상담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하며 평소 관심 있었던 불교와 심리상담 공부를 체계적으로 했다. 심리적으로 아주 힘든 시기였기에 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그리고 2015년도에 한국상담심리학회 상담심리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고, 그 이후에 서울 심리지원센터와 근로복지공단 상담심리사로 활동했다. 지금은 사회통합치유센터 마음복지관에서 상담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상담을 공부하며 무엇보다 나 자신이 많이 편해졌다. 남을 위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상담 공부였다. 꾸준히 명상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다양한 명상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리고 걷기, 명상, 상담심리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심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활동이다. 이 세 가지를 접목시킬 수 있다면 심신이 괴로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걷기 동호회에서 또는 개인적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거친 후 드디어 이 세 가지를 접목한 프로그램 초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내년부터 조금씩 시험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며 수정 보완하게 되면 구조화된 심신 힐링 프로그램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5월부터 매주 토요일에 ‘경기 둘레길’을 회원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고, 2023년 7월에 총 60개 코스 860km에 달하는 이 길을 함께 완보했다. 무슨 큰 계획을 갖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그냥 걷고 싶었고, 혼자 걸으면 중도 포기할 것 같아서 회원들과 함께 걸었다. 막상 완보하고 나니 큰 프로젝트를 끝냈다는 성취감도 느꼈고, 힘든 프로젝트였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되었다. 이 길은 완보하기 쉬운 길이 아니다. 우선 접근성이 매우 불편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도 아니고, 편의시설도 거의 없는 길이다. 우여곡절 끝에 완보한 후 서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며 함께 축하하기도 했다. 특히 길 안내자로 함께 걸으며 다양한 사람과 상황을 만나며 즐거운 시간과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끝날 즈음 갑자기 경기 둘레길을 걸으며  마음 근육이 많이 단단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겪는 삶은 사람과 상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과 상황은 좋아하는 사람과 싫은 사람, 편안한 상황과 불편한 상황으로 나눠진다. 좋아하는 사람과는 함께 있고 싶고, 싫어하는 사람은 만나기 싫다. 편안한 상황 속에 안주하고 싶고, 불편한 상황에서는 빨리 벗어나고 싶다. 인간의 욕심이다. 하지만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걸으며 마주치는 상황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 우리의 의지나 생각과는 다르게 불쑥 나타나서 우리는 즐겁게 만들거나 괴롭게 만든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나 상황은 매우 강렬한 담금질이다. 이런 담금질을 통해 마음근육이 단단해진다. 주변 사람이나 상황 탓을 하는 대신에 자신을 돌아보는 습관을 갖게 된 것도 경기 둘레길을 걸으며 얻은 큰 수확이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에는 사람과 상황에 대한 불편과 불만, 비난 등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이 남아있다.   

   

 경기 둘레길 마지막 후기를 쓰면서 걷기는 ‘심우도(尋牛圖)’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심우도는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하는데, 잃어버린 소를 찾아 떠나는 동자가 소를 만나서 씨름을 한 후 소 등 위에서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열 장의 그림에 그린 불화(佛畵)다. 동자는 수행자이고 소는 본성(本性)을 상징한다.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린 그림이다. ‘거짓 나’가 ‘참 나’를 만나는 과정이다. 걷는 이유를 오랜 기간 걸으며 찾아왔다. 경기 둘레길을 걸으며 한 가지 이유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바로 나를 찾기 위해서이다. 동자가 소를 찾아 떠나듯, 나는 나의 주인인 본성을 찾기 위해 걷는다. ‘나의 것’, ‘나의 생각’, ‘나’라는 인식은 모두 ‘나’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의 이름, 나의 재산, 나의 명예, 나의 권력, 나의 생각과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결국 '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죽이는 작업이 바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길을 걸으며 길동무들을 통해 나의 민낯을 보게 된다. 사회적 가면을 벗겨내는 작업이 바로 나를 죽이는 작업이다. 상황을 맞이하며 즐거움과 불편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는 모두 ‘나’라고 생각하는 환상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인식하며 나를 죽여나간다. '나'를 죽일수록 ‘참 나’에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내게 걷기는 나를 죽이는 과정이고,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명상이란 마음의 활동을 가라앉히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마음의 본성이 순수한 앎, 곧 알아차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직 알아차림만이 알아차림을 압니다. 비활동(non-activity) 혹은 비실천(non-practice)으로서의 명상을 통하여 마음의 활동은 가라앉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본질인 순수한 알아차림이 제약으로부터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루퍼트 스파이라 지음)

 

 나는 걸었고, 걷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걸을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걸을 것이다. 내게 걷기는 단순한 신체활동이 아니다.  길을 걷는 것이 내게는 명상이고 본성을 드러내게 하는 방편이다. 동자가 소를 찾아 떠나듯 나의 주인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하더라도 나의 주인을 찾는 작업은 절대로 포기할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다. 멈추면 나는 평생 ‘거짓 나’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가면을 벗어버리고 ‘참 나’를 만나고 싶다. 그리고 ‘참 나’로 살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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