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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투명 인간

by 걷고 2022. 8. 24.

65번째 생일이다. 아침 일찍 딸네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는데 요금이 ‘0원’으로 나온다. 어르신 교통카드를 사용한 첫날이다. 흔히 이 카드를 가진 사람들을 ‘지공 거사’라고 한다. 지공(지하철 공짜) 카드를 지닌 사람이란 의미로 약간은 자조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민연금을 신청하고 받을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다는 생각뿐이었다. 근데 지공 카드를 받는 순간 기분이 묘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노인으로 취급당하는 것에 대한 저항감인지, 아니면 나이 들어감을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무튼 이상한 감정이 느껴진다. 지하철 개찰구에서 ‘0원’이 표시된 숫자를 보는 순간 투명 인간이 된 느낌이 든다. 지나가도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고, 사람으로 대접받기는커녕 사람으로 취급당하지도 않는 보이지 않는 인간. 전반적으로 약간은 부정적이고 불편한 마음이 올라온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나의 삶이지만 죽음의 결정권은 내게 없다. 결국 ‘나의 삶’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 또는 보이지 않는 큰 힘이 나를 이끌어가고 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자율권은 주어진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를 결정하는 것뿐이다.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덕분에 큰 고통과 시련을 맞보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한참의 시간과 어려운 상황을 겪은 후에 비로소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틀림없는 나의 삶임에도 나의 주인이 따로 있다.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지만, 인정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고통만 더 커진다. 이 사실을 알고 확인하는데 65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어지간히 아둔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제는 사회에서도 투명인간이 되어 가고 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빠의 역할도 점점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고, 사회적으로도 창의적인 생산 활동을 하지 않고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65년의 삶이 그대로 무너지기에는 그간의 삶이 너무 억울하고 아깝다. 또한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내고 있다. 65년의 세월 속에서 배운 가장 큰 가르침은 ‘기다리고 버텨내기’이다. 그 힘으로 지금까지 살아왔기에 이 가르침은 체득되어 이미 나의 삶이 되어버렸다. 이런 삶의 태도는 결코 창피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세월의 풍파를 겪어온 사람들만이 느끼는 당당함이다. 그 당당함은 종종 자기 효능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투명 인간이 된 시점에서 다시 자신의 색깔을 입기 위한 노력과 투쟁을 이어갈 것이다. 투명인간은 자신의 모든 옷을 벗어던져버린 사람이다. 사회적 지위, 경제적 부귀, 명예, 권력 등을 포함한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자의에 의해서 건 또는 타의에 의해서 건 벗거나 벗겨진 사람들이다. 인생 1막이 끝나는 시점에 1막 속의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마지막으로 그 막까지 내리며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사람들이다.      

 

어떤 면에서 홀가분하다. 이미 투명인간이 된 사람은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조차 없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투명인간에게 어떤 관심조차 갖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욱 홀가분하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가면과 방어막을 벗어던지면 자신의 실체가 드러난다. 이제 ‘참 자기’와 만남을 시작하는 매우 중요한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오직 자신의 참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매우 귀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역할과 책임에서 벗어나서 오직 ‘참 자기’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삶을 포기하듯 스스로 사회에 불필요한 잉여 인간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편한 삶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은 자신만이 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책임도 오직 자신만이 질 수 있다. 업에 대한 업보는 매우 정확하게 받게 되고 피해 갈 수도 없다. 투명인간이 된 이후부터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그들의 노후의 삶의 질을 결정하게 된다. 네 가지 건강을 설정해 보았다.      

 

첫 번째가 ‘몸 건강’이다. 신체적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시점이기에 건강을 잃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비록 내게 12척의 배는 없지만, 두 개의 건각이 있다. 65년간 물집 단 한 점도 잡히지 않은 발을 갖고 있다. 건강과 친구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걷기 동호회 활동은 꾸준히 하고 있다. 회원들은 점점 젊어지고 있고 상대적으로 나는 점점 늙어가고 있다. 걷기를 통한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동호회에서 버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길 안내자를 자처하는 이유 중 하나도 동호회에서 퇴출되지 않기 위한 마지막 발악일 수도 있다. 물론 걷기를 매우 좋아한다. 산티아고를 한 번 더 갈 생각이고, 지금 걷고 있는 경기 둘레길을 완주한 후 코리아 둘레길을 모두 걸을 것이다. 그러면 5년 정도 흐를 것이고, 마지막으로 홀로 한가롭게 제주 올레길을 걸으며 걷기 여정을 마치고 싶다. 그 이후에는 집 주변을 여유롭고 한가롭게 걷고 싶다.     

‘마음건강’도 중요하다. 그간 불교 공부한다고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마치 아이쇼핑하듯 또는 수박 겉핥기 하듯 대충 공부하는 척하며 지내왔다. 오늘 아침에 ‘성철 스님 화두 참선법’이라는 책을 꺼내 들고 다시 한번 완독 했다. 그리고 송담 스님의 ‘화두 참선법’을 유튜브를 통해 시청했다. 이제 화두 참선을 시작할 시점이 왔다. 아이쇼핑은 끝났고, 실전에 들어가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송담 스님께 받은 화두를 다시 꺼내 읽었다. 송담 스님을 친견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큰스님을 친견할 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고, 아무 질문도 드릴 수가 없었다. 그냥 친견 자체가 주는 큰 울림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울림은 비록 지금은 사라져 버렸지만 오랜 기간 남아있었다. 그 기억만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다.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이고 쓰는 가운데 있으되. 움직이고 쓰는 그 가운데 거두어 찾으려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이 뭐꼬?’ 스님께서는 간절하게 화두를 들라고 말씀하셨다. 꾸준하고 간절한 공부만이 살 길이다. 나의 추인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공부의 방법은 송담 스님께서 이미 모두 말씀해 놓으셨다. 그 법문은 유튜브를 통해서 쉽게 찾고 들을 수가 있다.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은 이미 모두 만들어져 있다. 오직 의지만 있으면 된다.    

  

‘일상생활 건강’도 필요하다. 글쓰기를 꾸준히 하고 있고 독서도 꾸준히 하고 있다. 신문도 읽고 있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습관은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한다. 다만 가끔 TV를 오랫동안 보는 나쁜 습관이 있고, 술을 과음하는 습관도 아직 남아있다. 과음하면 몸이 아프고,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서 루틴은 깨져 버리고 TV만 보기도 한다. 과음이 원인이다. 물론 예전에 비해 술 마시는 횟수와 양도 많이 줄기는 했지만, 가끔 과음하는 경향이 있다. 절제할 필요가 있다. 화두 공부가 조금씩 익으면 저절로 언젠가는 금주를 할 날도 올 것이다. 마음건강과 일상생활 건강은 직결되어 있다.      

 

‘관계 건강’도 삶의 질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화를 내는 나쁜 습관을 빨리 고쳐야 한다. 화의 원인은 대부분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일어난다. 상황이든 사람이든 내가 원하든 대로 되기를 바라는 욕심 때문이다. 화는 욕심과 연결되어 있다. ‘하기 싫은 일 남 시키지 말고, 받고 싶은 것을 남에게 해 주기’라는 좋은 말이 기억난다. 원만한 관계를 위해 이 보다 좋은 말은 없다. 대부분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고 잘 안 될 경우에 화를 낸다. 또 대우받기를 좋아하며 남을 무시한다. ‘관계 건강’의 요점은 상호존중이다. 나 자신이 싫은 일 먼저 나서고, 좋은 일은 상대방에게 먼저 기회를 주면 된다.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아 말도 조금 줄여야겠다. 그리고 대신 남의 말에 좀 더 경청하는 습관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자랑할 것도 없으면서 가끔 자랑하며 으스대기도 한다. 나쁜 습관이다. 상대방이 한 얘기 중 불편한 얘기는 ‘그러려니’하며 넘기는 여유도 필요하다. 또는 나쁜 습관들이 올라올 때 바로 화두도 돌아오는 것이다. 일상과 곳곳이 모두 마음 도량이 된다.    

투명인간에서 벗어나 ‘참 자기’로 돌아가는 길을 65세 생일을 맞이한 날 정리해 보았다. 네 가지 건강, 즉 몸 건강, 마음건강, 일상생활건강, 그리고 관계 건강으로 정리된다. 비록 갈 길은 멀지만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불편하고 묘한 기분은 사라지고 오히려 건강한 삶의 원칙을 정하며 마음을 다지게 된다. 사회적으로 굳이 드러날 필요는 없지만, 자신에게만은 존재의 이유가 있고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삶을 즐겁고 풍요롭게 살기 위한 방편이다. 계획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더라고 하는 만큼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늘 하루 평온하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오늘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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