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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수요 저녁 침묵 걷기 08] 기분 좋은 날

by 걷고 2022. 7. 14.

하루 종일 비가 많이 내린다. 걷기 참석 신청한 분들도 호우로 인해 취소를 한다. 참석하기 위해 오는 분들도 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되는 축구 경기로 인해 교통이 심하게 정체되어 시간 맞춰 도착하지 못한다. 호우와 축구경기가 겹치는 저녁 시간에 걷기 위해 나오는 일 자체도 전쟁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비 오는 날 걷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혼자라도 걷기 위해 집을 나선다. 우비와 반바지를 입고 샌들을 신고 우산을 쓰고 나가니 걷기에 딱 좋은 날씨다.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는 무더위를 날려주고, 우산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기분을 경쾌하게 만들어 준다. 샌들을 신었음에도 빗물이 고인 곳을 피해 걷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일부러 물이 고인 곳을 지나며 발을 푹 담근다. 그러고 나니 빗속을 걷는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약속 장소인 월드컵 경기장 역 부근에는 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로 매우 혼잡스럽다. 우산을 쓰고, 선수들의 등번호가 있는 유니폼을 입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즐겁게 얘기하며 들떠있는 사람들로 주변은 매우 혼잡스럽다. 그 와중에 우비 장사와 음식 장사들이 좌판을 깔아놓고 판매에 열중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들뜬 모습도 보기 좋다. 단 한 가지 불편한 것이 있다. 역 주변에 모여 담배를 피워대는 사람들 때문에 숨쉬기가 불편하다. 역 앞에 있는 커피숍도 정신없기는 마찬가지다. 주문받는 사람들도 정신이 없고, take-out 하기 위해 줄 서있는 사람들도 많다. 매장 내부도 사람들로 가득하다. 알바 직원을 채용했는지 종업원들의 숫자도 많이 보인다. 비가 조금 그치기 시작하자 카페 외부에 파라솔을 설치하며 좌석을 더 준비한다. 난장이 따로 없다.      

 

 오늘 시각 장애인 한 분을 초대해서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걷기로 한 날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있듯이, 호우와 축구 경기가 겹친 날이어서 만나는 일도 쉽지 않다. 모임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만나 둘이 차 한 잔 하며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둘이 처음 만나는 날인데 서로 얼굴도 모르고 더군다나 상대방은 시각 장애인이다. 전화 통화를 해서 옷 입은 상태와 스틱을 들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만날 수 있었다. 비 오는 날 걷는 것을 좋아한다며 판초 우의를 쓰고 나타났다. 제주 올레길 걸었던 얘기, 산티아고를 걸을 계획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며 유쾌하고 밝게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겉모습으로는 그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그와 나는 공통점이 있다. 걷기, 상담, 명상을 접목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며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점이다. 20대 중반에 시각을 잃은 후 상담학 석사와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의지가 강한 사람이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서로 힘을 합해 일을 도모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있다. 다만 시절 인연이 필요할 뿐이다. 사람들과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라고 한다. 모든 만남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만남은 회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만남은 헤어짐의 다른 얼굴이다. 모든 만남은 헤어짐으로 끝이 난다. 다만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 다른 만남으로 이어질지 또는 그대로 인연이 풀어질지 결정된다. 만남을 억지로 이어가고 싶다고 해서 이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남을 회피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이어지게 만들려는 노력은 모두 우리의 욕심일 뿐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 ‘라는 진리는 주어진 상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과의 만남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 하고, 나쁜 인연은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네 마음이고 욕심이다. 욕심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힘들어한다. 그저 흐르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한평생 편안하게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이다.      

 

 오늘 만남도 그렇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해서 검색을 하게 되었고, 우연히 브런치에 올린 나의 글을 보고 연락을 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글이 인연이 되어 오늘 만남이 성사되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과의 만남은 매우 귀한 인연이다. 서로 뜻이 통했기에 만날 인연이 주어진 것이다.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간절함과 노력, 그리고 이루기 위해 준비를 해온 열정은 언젠가는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같은 에너지 파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게 되어있다. 따라서 어떤 만남도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다. 통화를 하고 오늘 만나 빗속을 함께 걷고 얘기를 나누며 나의 할 일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난 세월 속의 모든 경험들, 힘든 순간, 공부해 온 모든 것들, 사람들과의 만남, 자신을 찾기 위한 노력들은 ‘그 일’을 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살아온 모든 경험과 노력은 아직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은 ‘그 일’로 귀결된다. 언젠가 ‘그 일’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매일 주어진 일을 하며 기다리면 된다.      

 

 월드컵 공원에서 오늘 참석하기로 한 동호회 회원 한 분을 만났다. 교통 혼잡으로 너무 늦게 도착해서 공원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반가웠다. 세 명은 빗속을 걸었다. 월드컵 공원, 한강 공원, 메타세쿼이아 길을 걷는 사람들은 우리 세 명밖에 없다. 길의 주인이 된 세 명은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길은 걷는 사람이 주인이 된다. 그리고 주인이 될 자격을 갖게 된다. 오늘 처음 길을 함께 걸은 그분은 걷는데 전혀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계단이나 경계석 정도에 대한 안내가 필요할 뿐이다. 걷는 속도도 뒤처지지 않는다. 친화력과 적극성도 지니고 있어서 오늘 처음 만난 동호회 회원과도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대화를 나눈다. 시각 장애인이라는 편견 때문에 사전에 걱정했던 것들은 모두 기우에 불과하다. 앞으로 카페에 가입해서 당분간 내가 진행하는 걷기에 참석하고 싶다고 한다. 카페에서 사용할 닉네임으로 ‘꿈땅’을 사용할 생각이다. ‘꿈 땅’은 집단상담 진행하거나 참여할 때 사용하는 별칭으로 ‘꿈을 키우는 땅’이라는 뜻이다. 꿈땅님이 나오셔서 혼자 걷기 쉽지 않은 길을 함께 걸으며 즐거운 추억을 쌓아가길 기원한다. 비 오는 날 저녁에 좋은 길동무들과 걸은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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