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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수요 저녁 침묵 걷기 03] 침묵과 현존

by 걷고 2022. 6. 9.

 아내는 딸네 머물고 있고, 나는 홀로 집에 있다. 우리 부부는 요즘 딸네서 지내고 있다. 매주 수요일은 저녁에는 길 안내자로 활동하고 있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 걷기를 마치고 귀가하면 밤 10시경. 씻고 혼자만의 시간을 누린다. 가족들과 비록 떨어져 있지만, 같은 서울 내에 있고 언제든 볼 수 있기에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함께 살면서도 마치 남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떨어져 있어도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10시 이후에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NOW  행성의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로 에크하르트 톨레가 쓴 책이다. 이 사람의 책을 두 권 읽었다. 읽을수록 놀랍다. 그는 달라이 라마, 틱낫한 스님과 함께 21세기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라고 한다. 그의 책을 읽을수록 그가 다른 두 분과 같은 반열에 오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게 된다.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를 아우르며 자신만의 표현으로 알기 쉽게 삶의 진리를 풀어내고 있다.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중요한 부분을 필사하고 있다. 그리고 완독 후 필사한 내용을 정리해서 후기와 함께 올린다. 언제든 찾아보고 싶을 때 보기 위한 방편이다.  

   

이 책의 주제는 ‘에고’와 ‘무아’다. 우리는 에고로 인해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있고, 그 자신이 참 자기인 줄 알고 그 허구를 위해 평생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에고는 비교를 먹고산다. 즉 우월감과 열등감이 에고의 식량이다. ‘참 자기’로 알고 있는 허구인 ‘거짓 자기’의 노예 노릇을 하며 ‘거짓 자기’가 만들어 낸 ‘상(相)’을 지키고 더 높고 풍족하게 만들기 위해 평생 헛된 노력을 하며 살아간다. ‘무아’인 ‘참 자기’는 이미 그 자체로 충분하다. 틱낫한 스님께서 말씀하신 ‘이미 도착했다’라는 말씀과 같은 말이다. 불성인 부처 종자는 우리 모두 지니고 있지만, 그 훌륭한 종자를 죽이고 중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 분의 영적 지도자들은 우리에게 부처 종자를 살리기 위한 방편을 다양한 표현으로 말씀하시고 있다. 그분들 속마음은 매우 답답할 수도 있다. 아무리 얘기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거짓 자기’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질 것이다. 부처님도 정각을 이루신 후에 가르침을 포기했지만, 범신들의 간곡한 부탁을 듣고, 또 중생들이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전법활동을 시작하셨다.      

 

 축서사 무여 큰스님이 생각난다. 10여 년 전에 매월 도반들과 축서사에 가서 철야 정진을 한 후 다음 날 아침 무여 큰 스님을 친견하고 법문을 듣는다. 말이 철야 정진이지 좌복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그리고 철야 정진했다고 떠들고 다니던 철부지 시절이다. 큰 스님을 친견하면 매일 같은 말씀만 하신다. “수식관을 매일 꾸준히 수행하고 바쁘더라도 하루에 최소한 두 시간 이상은 정진하라. 조금 공부가 되면 하루에 최소한 네 시간 이상은 정진하라. 정진이 우선이 되어야 하고, 업무는 정진 외 시간에 하라.” 찾아 뵐 때마다 늘 같은 말씀만 하시니 답답하고 심지어 큰 스님에 대한 불신마저 들지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약 9개월 간 찾아뵙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 후회스러운 일이었다. 그 귀한 시간과 말씀을 허투루 듣고 허비했던 것이다. 그 당시는 그 말씀 외에 다른 말씀을 하셔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스님은 늘 그 자리에 계신다. 내 마음만 왔다 갔다 할 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엉터리 공부였음에도 불교 공부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 것이다. 사법(邪法)에 빠지지 않고, 정법을 찾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온 것이다. 그 시간과 공부가 밑거름이 되어 지금 책을 읽으며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당시 함께 공부했던 도반들과 가르침을 주셨던 스님들이 떠오른다. 무여 스님, 혜국 스님, 고인이 되신 정명 스님과 고우 스님, 송담 스님 등 늘 주변에는 훌륭한 스님들이 계셨다. 나의 어리석음으로 그분들에게 다가가지 못했거나 다가갔다가 되돌아오길 반복했을 뿐이다. 이제 그분들의 가르침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어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다. 하지만, 에크하르트 톨레의 책들이 그 스님들을 대신해서 가르침을 베풀고 있고, 이제 조금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해한 것과 체득한 것은 하늘과 땅만큼 그 간격이 크다. 언젠가는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거짓 자기’로 만나고 헤어진다. 두 명이 만나는데 ‘참 나’와 ‘거짓 나’, 그리고 ‘참 너’와 ‘거짓 나’, 이 네 가지가 만나고 있다. 본성과 허상이 뒤섞여 만나고 있다. 그리고 울고불고 싸우고 사랑하며 지지고 볶는 삶을 산다. 후회를 한 후에 다시 반복을 거듭하고 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며 사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삶 속에서 ‘참 나’와 ‘참 너’는 사라지고 허상들만이 만나서 불화를 자초한다. 그 원인 중 하나가 ‘말이다. ’ 말‘은 또는 ’ 언어‘는 사실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적확하게 진실을 표현해 낼 수는 없다. ’ 말‘ 또는 ’ 단어‘는 우리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낸 수단일 뿐이다. ’ 빵‘을 말로 표현한다고 해서 ’ 빵‘을 느낄 수는 없다.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그 ’ 빵‘이라는 아주 사소한 단어 한 개 때문에 우리는 일생을 낭비하며 살아간다. 같은 단어를 다른 상황에서 사용하면 완전히 정반대의 말이 되기도 한다. ’ 너 참 잘한다 ‘라는 문장은 비꼬는 투로 얘기해도 같은 문장이다. 하지만, 그 이면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 말‘과 ’ 단어‘는 편의를 위한 수단이지만, 오히려 이것들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불화가 발생하며 서로 싸우기도 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스스로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     

 

‘침묵’을 ‘성스러운 침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분명하다. ‘침묵’만큼 성스러운 말은 없다. 남을 비방하고, 자신을 자랑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 외의 말은 ‘침묵’이라고 법정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남을 비방하거나 자신을 자랑하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의 표현이다. 남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 역시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방편이거나 남을 자신의 뜻에 맞게 만들기 위한 교묘한 수법이다. 모두 에고를 강화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자신의 ‘참모습’으로 알고 그 모습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이루면 성취의 희열을 맛보고, 못 이루면 실패의 괴로움을 맛본다. 그리고 다시 이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한다. 끝없는 자신의 허상과의 싸움이다. 평생 돌을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의 삶이다. 틱낫한 스님은 “이미 도착했다. “라는 단순한 문장으로 현존의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에크하르트의 책에 나온 내용과 단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삶의 진리를 본 사람들은 ‘세수하며 코 만지듯 쉽다’고 한다. 세상사 어려울 일이 없다는 말씀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늘 지금 여기에 머물려 현존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평온한 삶의 열쇠이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생활에서 적용하기는 어렵다. ‘자각’만이 살 길이다.      

 

“생각과 감정을 자기 자신과 완전히 동일 시 하는 것, 이것이 에고이다. (..........) 몸을 자각하는 그 행위가 당신을 지금 이 순간에 닻을 내리게 할 뿐 아니라, 에고의 감옥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출구 역할을 한다.” (에크하르트의 NOW 본문 중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 걷기를 두 시간 정도 진행하는데, 중간에 30분 정도 침묵 걷기를 한다. 참석자들이 잘 따라 해 주고 있다. 어떤 참석자는 침묵 걷기를 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한다. 그렇다. 하루 종일 우리는 소음 속에서 살아간다. 기계소리, 차 소리, 음악소리, 사람들 목소리 등 엄청난 소음 공해 속에서 살아간다. 그뿐 아니라 잠시도 쉬지 않는 머릿속 소음도 있다. 자신의 내부와 외부 모두 소음이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침묵 걷기를 하는 단 30분의 시간만이라도 자신과 대화를 하며 소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정리할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풀어낼 수도 있고, 자신의 실수를 돌이켜 볼 수도 있다.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 동안 외부 소음을 저절로 멈추게 된다. 침묵 걷기 후 약 3분 정도 종소리 명상 시간을 갖는다. 하루에 단 1분 만이라도 청각에 집중하는 명상을 통해서 내부와 외부 소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몸을 자각의 수단으로 사용하며 종소리를 듣는 것이다. 소리에 집중하는 순간 모든 소음을 사라진다. 소음이 들리거나 머릿속 목소리가 들린다면 다시 종소리에 집중하면 된다. 단 1분 만이라도 청각에 집중함으로써 마음의 여유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공간을 조금씩 넓힐 수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이미 도착했다’는 현존의 순간이다. 현존의 순간이 길어질수록 그만큼 평온한 삶을 살 수 있다. 침묵 걷기를 진행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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