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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292] 삶의 짐

by 걷고 2021. 10. 26.

날짜와 거리: 20211025 11km
코스: 한강공원, 월드컵공원, 메타세콰이어길
평균 속도: 4.1km/h
누적거리: 5,189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길을 걸으며 가을을 느낀다. 그간 숨겨왔던 아름다운 색깔을 드러내는 단풍나무들과 떨어진 낙엽을 보며 다시 가을을 느낀다. 바람은 선선하고 날씨는 화창하다. 걷기에 최적의 계절이다. 삼삼오오 모여 강변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고, 자전거를 타거나 애완견과 걷는 사람들도 보인다. 한 여성 라이더는 자전거를 세우고 한강 공원에 조성된 꽃 밭 촬영에 열중이다. 불광천에 외로이 서 있는 고니 한 마리를 찍고 있는 수녀님 모습도 보인다. 수녀님과 물새를 동시에 사진에 담으려 했으나 기회를 놓쳤다. 연세가 있어 보이는 수녀님은 몸집에 비해 제법 큰 카메라를 메고 고니를 사진에 담기 위해 집중하고 있다. 수녀님의 모습과 물새의 모습이 닮아 보인다. 외로움일까? 평생 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진 찍는 취미를 갖고 있어서 삶이 건조하지는 않을 것 같다. 종교인도 한두 가지 정도의 취미를 갖고 있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취미는 단순한 놀이와는 다르다. 취미는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한강변을 지나 메타세콰이어길을 걷는다. 초등학생보다 어린 아들이 자전거 타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는 젊은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그 부자의 모습이 너무 정겹고 아름답다. 부자의 모습을 보며 제주살이 하고 있는 사위와 딸, 손주들 모습이 떠올랐다. 조금 후에 아빠가 먼저 출발하고 아들은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아빠를 따라간다. ‘각인’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1973년 노벨상을 탄 오스트리아 학자 로렌츠(Konrad Lorenz)는 인공부화로 갓 태어난 새끼오리들이 태어나는 순간에 처음 본 움직이는 대상, 즉 사람인 자신을 마치 어미 오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런 생후 초기에 나타나는 본능적인 활동을 각인(imprinting)이라고 불렀다. 각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극에 노출되는 시기가 매우 중요한데, 이를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라고 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사위, 딸, 두 손주들은 지금 제주도에서 지내고 있다. 사위는 회사에서 선발되어 서울대학교 경영 대학원 수업을 2년간 받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대부분 온라인으로 수업이 진행되어 올 중반부터 제주도에 내려가서 공부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업은 최근에 모두 마쳤고 내년 초에 회사로 복귀한다. 퇴직 전까지 지금처럼 2년이라는 재충전의 기회가 주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사위의 제주살이 모습이 그려진다. 지금은 본가 어머님과 동생이 제주도에 머물고 계신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아내와 장모님께서 다녀오셨다. 이전에도 양가에서 각각 한 번씩 다녀가셨다. 친구들도 다녀갔다고 한다. 사위는 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에 다녀가기도 했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이삼일 온라인 수업도 들었다. 아이들과 좋은 추억을 쌓기 위해 틈이 날 때마다 카페나 승마장, 폭포 등을 다녀오기도 하고, 이 기회에 골프를 배우기 위해 레슨도 받고 있다고 한다. 사위에게, 물론 딸도 마찬가지겠지만, 제주살이는 결코 재충전의 시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즐거운 추억의 시간은 될 수 있겠지만 두 아이들과 정신없이 보내는 사위와 딸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길을 걸으며 사위 생각이 많이 난다. 아빠의 역할, 가장의 역할과 남편의 역할, 아들과 형의 역할, 사위의 역할, 회사 중간 간부의 역할 등 수많은 역할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은 무엇인지,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 바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럽다. 물론 제주살이는 본인의 선택이었기에 스스로 만족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사위의 모습이 마냥 행복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생각이 기우일 수도 있다. 사위는 나름대로 자신이 원하는 가장의 모습, 가정의 모습, 자신의 삶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충실하게 역할 수행을 하느라 정작 자신만의 삶은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우려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위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사위에게 미안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카톡에 답을 하지 않는다고 화를 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가정사에 대한 질문을 한 점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딸에게 들었던 얘기를 굳이 다시 확인해서 사위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주택 구입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빌려달라고 할 때에도 갚는 방식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있어서 불편했던 것도 장인으로서 또 사회 선배로서, 어른으로서 좋은 태도는 아니었다. 이 세 가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미안하고 쥐구멍이라도 숨어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다. 지금 기억나는 것 외에도 내 의도와 상관없이 사위와 딸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 11월 초에 아내와 함께 제주도에 내려가서 일주일 정도 머물 생각이다. 올레길 걷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손주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사위와 딸에게 잠시라도 휴식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다. 사위와 저녁에 소주 한잔 마시며 그간 미안했던 점에 대한 사과도 하고 싶다. 더 늙기 전에 또 더 시간이 흐르기 전에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수녀의 사진 찍는 모습을 보며 과연 우리 사위의 취미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아직 사위의 취미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부족한 장인이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는 것도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가끔은 홀로 자신만의 취미생활을 즐기며 자신에게 보상을 해주는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인간의 에너지는 무한정이 아니다. 그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하고 재충전하느냐가 삶의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에너지를 충전하지 못하면서 계속 사용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방전, 즉 번 아웃이 올 수도 있다. 완전한 방전이 되기 전에 충전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우리 사위의 취미는 무엇일까? 그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가슴을 설레게 만들고, 삶의 활력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작년 말에 사위는 나와 둘이 울릉도에 놀러 가자고 제안했다. 언젠가 울릉도에 가고 싶다고 얘기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코로나로 인해 취소되었지만, 언젠가는 단 둘이 시간을 보내며 가장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편안한 휴식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 가슴 뭉클했던 추억도 떠오른다. 나는 걷기에서 귀가하는 중이었고, 사위는 딸과 함께 우리 집을 다녀가는 길이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봤더니 사위가 차 안에서 나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다가가서 반갑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 소리를 들으며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도 그 상황만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는 결혼 후 지금까지 나를 한 번도 ‘장인어른’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부른다. 나도 그를 ‘자네’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른다. ‘장인어른’이나 ‘자네’는 뭔가 거리감이 있어서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부르고 싶다.

‘그’나 ‘나’나 우리는 모두 삶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삶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휴식을 취할 수는 있겠지만, 살아있는 동안 삶의 짐을 없애거나 버릴 수는 없다. 삶의 짐은 삶의 이유이기도 하고, 삶의 동력이기도 하며, 동시에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다. 삶의 짐은 겉모습을 보면 사람마다 크기의 차이는 있어 보이지만, 무게는 모든 사람이 단 한 치의 차이도 없이 똑같다. 다만 삶의 무게를 느끼는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10kg의 무게를 1톤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g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같은 무게를 각자 다르게 받아들인다. 또한 삶의 무게를 견디는 내공이 쌓이면 같은 무게도 가볍게 느껴진다. 삶이 힘들다고 짐을 아예 버리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손등 없는 손바닥이 없듯이 삶의 짐이 없는 삶은 존재할 수 없다. 짐을 지고 오랫동안 멀리 가기 위해서 가끔은 그 짐을 내려놓고 편안한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년이면 회사로 복귀하는 우리 사위가 단 며칠만이라도 삶의 짐을 내려놓고 온전한 휴식 시간을 보내길 진심으로 바란다. 제주도에서 함께 보낼 시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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