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길도 누구와 함께 걷느냐에 따라 다른 길이 된다. 길이 변하는 것이 아니고 길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의 변화로 다른 길로 느껴지는 것이다. 편한 사람과 걸으면 길도 편하고 걷기도 수월하고 걸으며 즐겁다. 반면 불편한 사람과 걸으면 걷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빨리 끝나기만 기다리게 된다. 길과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끼지도 못하고 걷는 내내 불편함만 가득하다. 모든 것이 상대방의 잘못 때문이고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하며 상대방에 대한 비난을 한다. 근데 억울한 것은 그로 인해 나의 마음 상처만 깊어진다는 것이다. 상대방 탓을 하면 나는 편해져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탓을 하면 할수록 나의 마음만 더욱 불편해진다. 상대방은 나의 불편함과 무관한 듯 마치 아무 일도 없듯이 행동한다. 그 모습을 보면 더욱더 짜증이 올라온다. 그리고 다시 불편함은 더욱 커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보는 장사다. 그러니 또 화가 난다.
반면 편안하고 반가운 친구와 걸으면 힘든 길도 즐겁고, 어떤 얘기를 해도 웃고, 길이 빨리 끝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만남이 반갑고 그 기쁨은 쉽게 전염된다. 그 전염은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걷는 내내 웃음과 대화는 끊이지 않는다. 걷는 속도에 따라 또 각자 하는 행동에 따라 걷는 파트너가 자연스럽게 바뀌며 멋진 walking cocktail party가 된다. 힘든 오르막길도 파티장이 되고, 비 오는 날 천막이 없어도 온 세상 자체가 파티장이 된다. 어떤 길도 또 누구도 우리의 행복을 앗아갈 수 없다. 행복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따라서 누구도 행복의 조건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행복 자체를 빼앗을 수는 없다. 조건은 외부의 상황이고 행복 자체는 내면의 상황이다.
오늘 오랜만에 사찰을 방문해서 스님 법문을 듣고 왔다. 티베트 불교를 공부하신 스님이다. 그분의 동영상 법문을 십여 편 듣고 나니 한번 찾아뵙고 직접 법문을 듣고 싶었다. 마침 하루 수행 프로그램이 있어서 사전에 신청한 후 다녀왔다. 오늘 법문 주제는 로종수행이다. 로종은 시각의 변화를 통한 변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즉 겉으로 보이는 모든 세상은 물거품에 불과할 뿐이고 허상이다. 그런데 그 허상에 스토리를 만들어 허상을 실상으로 만들고, 그 거짓 실상과 싸움하며 괴로움 속에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니 중생이다. 허상임을 알아차리면 허상은 사라진다. 허상이 사라지만 진면목이 드러나고, 그 실상을 알아차리면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진다.
좋은 길벗도 없고 나쁜 길벗도 없다. 우리가 만들어 낸 허상이다. 좋은 길벗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쁜 길벗이 되고, 나쁜 길벗이라 생각했던 길벗이 나에게 잘 대해주면 좋은 길벗이 된다. 좋고 나쁨은 결국 자신의 주관이 만들어 낸 허상이다. 즉 스토리를 만들어 각색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절대적인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없다. 다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고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고 판단할 따름이다. 맛난 음식도 자주 먹으면 처음의 맛이 사라진다. 비싼 차도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게 되고 그냥 타고 다닌다. 멋진 옷도 시간이 지나면 그다지 멋져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은 무상이다. 즉 변한다.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착각하며 속아서 살아간다. 억울하다.
억울함을 알면 변화를 위한 시도를 하게 된다. 즉 허상에 속고 살아가지 않는 방법을 찾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주관이 만든 허상에 불과하다. 삼라만상이 모두 허상이다. 금강경에 나오는 경구가 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모든 상은 원래 허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면 바로 여래를 볼 수 있다. 글로는 이해되고 생각으로는 알 것 같은데 막상 실행에 옮기는 것은 어렵다. 업보 때문이다. 업보를 닦는 방법 중 하나가 생각이나 감정에 끌려 다니지 않고 그 순간의 감각을 느끼며 아무런 판단 없이 감각만 지켜보는 것이다. 감각도 무상하다. 시간이 지나며 감각의 느낌이 변하거나 위치가 변한다. 그리고 사라지고 다른 감각이 떠오른다.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고 이것들에 매몰되지 않고 감각을 느끼며 감각의 무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업장을 소멸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마음챙김 걷기를 하는 이유다.
길을 걸으며 사람과 상황을 만난다. 좋거나 불편한 상황을 맞이한다. 그때 그 상황에 빠지지 않고 감각에 집중하며 걷는다. 생각과 상황은 이미 과거가 되었거나 미래의 상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감각은 오직 ‘지금-여기’에서만 존재한다. 마음챙김 걷기를 통해 ‘지금-여기’에 존재하게 되고, 그 방법만이 미래나 과거에 살지 않고 현재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감각에 집중하는 순간 생각과 감정은 사라지니 마음도 편안해진다. 이 좋은 방법을 알면서도 걸으며 자꾸 생각과 감정에 빠진다. 알아차림이 늘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다. 생각과 감정의 싹이 올라올 때 빨리 알아차리면 된다. 그리고 감각에 집중하며 걸으면 된다. 참 쉬운데 막상 하려면 잘 되지 않는다. 꾸준한 반복적인 연습만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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