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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단순한 삶

by 걷고 2024. 4. 2.

 암 투병하고 있는 친구의 이름은, 아니 법명(法名)은 ‘벽안’이다. 해남 미황사 ‘참 사람의 향기’라는 7박 8일 참선 프로그램에 참가한 후 주지 스님인 금강 스님께 받은 법명이다. 회향식에 맞춰 친구 범일과 함께 미황사에 가서 그 친구의 회향을 축하하며 함께 올라온 기억이 있다. 참 희귀한 인연이다. 앞으로는 암 투병하는 친구라는 말을 안 쓰고 대신 벽안으로 칭하고 싶다. 투병은 뭔가 애쓰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매우 평온하게 지내고 있다. 그래서 그냥 법명으로 부르고 싶고, 그렇게 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최근에는 만나지 못했는데, 범일의 말을 들어보니 매일 뒷산을 가볍게 맨발 걷기하고 있고, 찬불가 합창 단원으로 다시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어떤 일이든 일단 시작하면 꾸준히 열심히 하는 친구다. 다시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며 병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놓이고 고맙다. 벽안은 이런 사람이다. 나의 자랑스러운 친구다.    

  

 그 친구가 며칠 전 보내온 카톡 내용이 계속 마음에 남아 맴돌고 있다. “참 삶이 간단한 데 제가 참 복잡하게 살았더라고요.” 그에게 병은 어쩌면 축복일 수도 있다. 이 말이 그 친구에게 한편으로는 서운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다. 삶의 큰 변화나, 힘든 질병,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그 일을 극복한 후에 과거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이런 상황을 통해 자아성찰을 하며 과거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나 역시 과거의 힘든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여유롭고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삶 속에도 자잘한 굴곡은 상존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삶의 굴곡은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만든다.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그 이전과는 반대되는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매우 엄격한 수행자는 매우 편안하게 변하고, 매우 유쾌한 수행자는 매우 엄숙한 모습으로 변하고, 매우 부지런한 수행자는 매우 게으른 사람으로 변한다고 한다. 물론 중생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지, 본성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삶의 고통과 마주치는 매 상황을 통한 깨달음은 우리에게 같은 세상을 살아가되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러니 삶의 고통, 질병, 굴곡이 결국은 축복이 아닐까?      

 

 극복하는 과정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삶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게 되고, 더 이상 과거처럼 살지 않겠다는 마음을 다지게 만들어준다. 그의 표현대로 그는 어쩌면 간단한 삶을 복잡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주도권을 부모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자신의 주인으로 살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이다. 평생 은행에서 근무하고 지점장으로 퇴임한 후 금융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공부도 했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언제든 달려가서 도움을 주었다. 약 10년간 길거리 버스킹 공연을 하며 불우 이웃을 위한 모금 운동을 하기도 했고, 몇 년 전부터는 찬불가 보급을 위해 전국 사찰을 다니며 홍보와 지도를 하며 늘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온 친구다, 그런 친구가 큰 병을 통해 참 단순한 삶을 복잡하게 살아왔다고 한다. 그의 말을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이리 사나, 저리 사나, 한번뿐인 인생,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고, 이룬 모든 것은 덧없네. 그냥 이 순간을 단순하게 살자.”    

 

 그의 글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내린 것은 어쩌면 나의 마음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그의 말을 통해 내가 살고 싶은 나의 삶을 해석한 것이다. 그렇다. 참 단순하게 살고 싶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 흔히들 내려놓으면 된다고 하는데, 말이 쉽지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원인은 단순하다. 욕심과 그 욕심을 만들어내는 어리석음, 그리고 그 어리석음 이면의 이기심 때문이다. 이기심은 존재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다. 그 방편이 다시 업보가 되어 다른 존재를 생성시킨다. 반복된 윤회다. 벗어나고 싶다. 나를 없애야 가능한 일이다. ‘나’는 죽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업의 덩어리인 ‘나’는 죽어도 윤회를 하고, 살아서 다시 윤회를 위한 씨를 계속해서 뿌린다. 살아서 업의 덩어리를 해체해야만 한다. 살아있는 매 순간 업의 덩어리인 ‘나’를 죽여야 한다. 내가 편안하게 살기 위해 ‘나’를 죽여야 한다. 쉽게 죽지 않으니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욕심을 줄이고, 불필요한 업을 짓지 않고, 어제와는 조금이라도 더 단순하게 살아가야 한다. 매 순간 마음 챙김을 놓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나의 언행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우선순위를 만들어보았다. 걷기, 명상, 글쓰기, 독서, 상담, 이 다섯 가지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다섯 가지라는 가짓수 많다. 상담과 독서를 떼어낸다. 상담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고 돈벌이를 위한 상담을 위해 상담센터를 두드리지 않겠다는 의미다. 인연 있는 내담자는 기꺼이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도울 것이다. 독서를 의식적으로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읽으면 된다. 어떤 목적을 갖고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읽으면 된다. 두 가지를 떼어내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그만큼 단순해진 거다. 걷기는 일상이니 굳이 한다는 생각 없이 늘 하고  있다. 명상은 매일 아침에 한 시간 정도하고 있으니 아침에 일어나 그냥 하면 된다. 걷기 명상도 하고 있고 마음 챙김을 일상 속에서 하고 있으니 이 역시 굳이 한다는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글쓰기는 아침 식사 후 늘 하듯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면 그냥 쓰게 된다. 요즘은 매일 쓰지는 않지만, 그래도 꾸준히 쓰고 있다. 그래서 쓴다는 노력 없이 쓰고 있다. 걷기, 명상, 글쓰기, 이 세 가지는 별도의 노력 없이 일상 속에서 이미 하고 있는 일이다.      

 

 길을 걸으며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동시에 몸과 마음의 건강을 챙긴다. 명상을 하며 마음 정원을 쓸고 불필요한 쓰레기를 버리는 작업을 한다. 불필요한 것들이 없어질수록 마음은 가벼워진다. 그리고 글을 쓰며 다시금 마음 정원을 좀 더 단출하게 만든다. 예전의 어르신들이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쓸고 하루를 연다. 그렇듯 나는 걷고, 명상하고, 글 쓰며 마음 정원을 매일 쓸고 또 쓴다. 매일 쓸어도 이미 쓴 이전의 자리에 다시 잡풀이 올라오고 있다. 그래서 쓸고 또 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거나 삶이 끝난다고 해도 사과나무 심는 대신 마음정원을 쓸고 또 쓸고 싶다. “이리 사나, 저리 사나, 한번뿐인 인생,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고, 이룬 모든 것은 덧없네. 그냥 이 순간을 단순하게 살자.”      

 

 지난 주말에 오랜만에 경기둘레길을 걸었다. 과거를 묻고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미래도 묻는다. 강물은 과거나 미래가 없다. 오직 지금의 흐름만이 있다. 비록 폭풍우가 몰아치고, 한파가 닥치고, 홍수가 와도 잠시 풍랑이 거세게 일뿐이다. 그리고 강물은 늘 그렇듯 아무 일도 없듯이 흐르고 또 흐른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냥 흐른다. 나도 그냥 걷고 명상하고 글을 쓴다. 단순한 삶을 꿈꾸며 단순한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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