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문맹이 있다. 금융의 문외한인 금융문맹이 있다. 글을 알지만 금융 관련 글을 읽으며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마음 문맹도 있다. 누군가의 마음에 공감을 못하고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불편함만 얘기하는 사람이다. 염치 문맹도 있다. 낯 부끄러운 일을 하면서도 스스로 염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귀는 뚫려 있어서 소리는 듣지만 음악은 듣지 못하는 음악 문맹도 있다. 내가 바로 음악 문맹이다. 언젠가부터 음악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음악을 듣는 귀가 열리면 삶이 훨씬 더 풍성해질 수 있을 것 같고, 음악을 통해 메마르고 차가운 마음을 녹이고 싶다.
음악 하면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다. 학창 시절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환경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은 버스 안이다. 버스 타고 통학을 하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다. 통기타 가수들이 부르는 포크송을 버스를 타고 들으며 한 두 곡 정도 익힌 것이 전부다. 고교 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그 친구 책상 위에 있는 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신기하게 보였다. 그는 늦은 시간에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을 듣는다고 했다. 그 친구와 그 라디오가 너무 부러웠다. 친구들이 음악 방송 얘기를 하면 나는 할 얘기가 없어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만 했다. 다른 친구는 가회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 친구 집에 가면 늘 교향곡이 마루에 웅장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모 대학 음악학장으로 근무하다 은퇴했다. 가회동 기와집도 부러웠고, 음악을 늘 듣고 사는 그 친구가 부러웠다.
고교 시절 전세 집에 살 때였다. 주인집 마루에는 전축과 레코드판이 있었고, 책장에는 셰익스피어 전집이 있었다. 음악을 듣고 싶고 알고 싶은데 방법도 모르고 무엇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몰랐다. 외국 노래를 단 한 곡도 모른다는 사실도 창피했다. 주인 허락을 받고 주인이 없는 동안에 레코드판을 올려놓고 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들었다기보다는 나도 이런 음악을 알고 있다며 음악에 대한 무지를 감추려고 했었다. 그때 들었던 음악이 Scarborough Fair, Feelings, El Condor Pasa 같은 노래다. 레코드판 뒤에 있는 가사를 따라 부르며 외우기도 했다. 그 외에도 몇 곡이 더 있는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 전집도 그때 읽었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이런 유명한 작가의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학창 시절은 어떤 꿈도 생각도 없이 그냥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살았던 것 같다. 흥미 있는 분야도 없었고, 알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나마 영어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직장생활과 사업도 영어 덕분에 그나마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
인테리어 사업을 할 때였다. 중견 기업의 사무실을 네 개 층에서 세 개 층으로 줄이는 프로젝트였다. 레이아웃과 조닝 플랜을 잘 정리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일본에서 전문가를 초대해서 자문을 구하며 한 달 이상 준비했고 마지막 2주간은 사무실에서 먹고자며 밤낮으로 준비했다. 회사 설립한 지 채 2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고, 규모도 아주 적은 회사였지만 입찰에 참여했다. PT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음악을 틀었다. 무슨 음악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일반 유행가였던 거 같은데 음악이 피부 속으로 파고들었다. 차 안에 음악이 가득했고, 음악을 들으며 저절로 눈물이 났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TV를 보는데 웃기는 장면이 나오면 웃고 있었고, 슬픈 장면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그때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 나의 모든 것을 쏟아낸 후에는 모든 것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즉 나를 온전히 비우거나 버리면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지며 주변의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중요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이 경험을 잊고 살았다. 그 프로젝트 수주에 실패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약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회사 빌딩이 위치한 동네 근처조차 가기도 싫다.
최근에 음악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며 음악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떠올랐다. 니르바나 오케스트라를 설립해서 오랜 기간 운영하셨던 강형진 단장님을 만나 경희궁을 걸으며 음악을 듣고 싶다고 했다. 매우 고맙게도 단장님은 음악을 자주 보내주신다. 귀는 뚫려있어서 소리는 듣지만 아직 음악을 듣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꾸준히 들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음악을 보내 주시면서 음악에 관한 조언을 한 가지 해 주셨다. “Over the rainbow가 뭔지, 첼리스트 Yo Yo ma가 누군지, 반주자는 누군지....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세요. 유튜브 주소도 링크시켜 놓으시고. 그다음에 연관된 연주자나 곡목을 만나면 금방 가까워지게 된답니다. 말러 교향곡도 마찬가지고요. 똑같은 곡을 성악가가 부른 것도 보내드려 볼게요..... 음악 세계를 알면 또 하나의 세계가 열립니다.” 참 시기적절하게 유용한 고마운 조언이다. 그래서 용기 내어 음악 일기를 쓰기로 했다. 음악 문맹이 음악 일기를 쓴다는 것이 우습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 음악을 알아가는 과정을 진솔하게 정리하고, 음악 일기를 작성해서 언제든 듣고 싶은 음악을 꺼내볼 수 있게끔 하고 싶다.
친구의 아들과 딸이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수개월 전에 그 친구에게 음악을 듣고 싶어 작은 오디오 하나 구입하고 싶은데 어떤 것이 좋은지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 친구는 아이들이 썼던 오디오인데 최근에 새것으로 구입해서 사용하지 않는 오디오가 있다고 선물로 보내줬다. 노트북에 연결에서 음악을 들으니 음악이 풍성하고 부드럽게 들린다. 노트북에서 듣던 음악과는 다르게 들린다. 요즘은 혼자 있는 시간에는 음악을 조금 크게 틀어놓고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거나 할 일을 하고 있다. 그 시간이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그 친구에게 며칠 전 무선 이어폰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했고, 그 친구가 추천한 제품 중 하나를 아내를 통해 구매했다. 다음 주 초에 도착할 것 같다. 혼자 있는 시간에 조용히 음악을 듣고 싶다. 카페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혼자 여유롭게 걸으며, 또는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언제든 편하게 듣고 싶어서 무선 이어폰을 구입했다. 내가 음악을 듣기 위해 전자기기를 산다는 사실이 내게는 무척 낯설다. 하지만, 낯선 것을 익게 만드는 것이 삶의 지혜다. 꾸준히 들으며 생각나는 대로 음악에 대한 느낌과 작곡가, 연주가 등을 정리해서 음악일기를 꾸준히 써내려 갈 생각이다.
60대 후반의 나이에 할 일이 제법 많아졌다. 걷기, 글쓰기, 심리상담, 명상이 내가 해 온 일이고 앞으로 평생 할 일이다. 거기에 음악이 한 가지 더 추가되었다. 이 다섯 가지 친구들은 평생 나와 함께 지내며 나의 삶을 풍요롭고 의미 있고 활기차게 만들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강단장님 덕분에 평생 친구인 음악을 만나기 시작했다. 음악을 듣고 음악 일기를 쓸 일에 마음이 설렌다. 강단장님과의 귀한 인연에 감사할 따름이다. 다음 주 초에 도착할 무선 이어폰을 기다리는 설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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