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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367] 소설 '스토너'와 '싯다르타'

by 걷고 2022. 5. 2.

날짜와 거리: 20220429 - 20220501  32km

코스: 인왕산 둘레길 외

평균 속도: 2.4km/h

누적거리: 6.684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세상이 변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외출을 삼가고 식당 출입을 삼갔던 모든 사람들이 마치 그간의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모두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다. 봄이 왔고, 햇살도 좋고, 사람들 마음도 가볍다. 인왕산에 부는 시원한 봄바람에 산도 춤추고 산길을 걷는 우리의 몸과 마음도 춤춘다. 코로나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미 우리들 마음속에 코로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부디 코로나가 우리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길 바랄 뿐이다. 각자 알아서 개인 방역을 잘 유지하길 바란다. 인왕산 둘레길을 지나 서촌 방향으로 내려와서 ‘먹자골목’으로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식당에 들어가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먹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다. 음식에 대한 나의 무지인가? 아니면 그들의 음식에 대한 예민한 호불호인가? 구별이 되지는 않는다. 비록 나는 그냥 그런 식당에 줄 서서 기다리지는 않지만, 그들의 기다림은 존중한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도 삶 속에서 배운 지혜이다. 

 최근에 두 소설을 읽었다. 존 윌리엄스 장편소설 <스토너>와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이다. 두 소설은 서로 연결된 점은 전혀 없는데 이상하게 비슷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스토너>는 ‘스토너’라는 영문학 교수의 일생을 그린 소설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교수가 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 결혼 후 부부간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상황, 학교 내에서 한 교수와의 불화, 유일한 희망인 딸의 탈선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 한 번의 외도를 통해 얻은 일시적인 마음의 평화, 암의 발병 등을 다소 지루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이유는 그의 삶의 모습이 우리네 삶과 비슷하다는 보편성 때문인 것 같다. 결혼 생활 외에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열정과 딸을 사랑하는 마음 등을 고려하면 꽤 잘 살아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범하지만 잘 살아온 교수의 삶을  소설은 결코 잘 살아온 모습으로 그리지 않고 그냥 한 사람의 삶의 모습으로 매우 평범하게 그려내고 있다. 밋밋한 삶, 지루한 삶, 불편을 모두 감수하며 수행자처럼 살아가는 삶, 자신을 표현할 줄 모르는 답답한 삶 등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 한 구석에 분노와 아픔, 안타까움을 느끼게 만든다. 그의 열정은 세 가지에서 표현된다. 학생들을 지도하고 공부할 때의 학자로서의 열정, 딸에 대한 사랑과 딸을 그리워하는 열정, 그리고 젊은 여성과의 일시적인 탈선을 할 때의 열정이다.

 

 <싯다르타>는 구도자 ‘싯다르타’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좋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삶의 권태감을 느끼며 수행하기 위해 출가한다. 선생들을 만나 고행의 방법을 배우기는 하지만 그저 단순한 고행일뿐 삶의 지혜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들의 곁을 떠난다. 홀로 외딴곳에서 수행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마을에 들어서면서 애욕과 탐욕에 눈뜨게 된다. 카말라라는 창녀를 만나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육체적인 쾌락에 탐닉하게 된다.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카와스와미라는 상인을 만나 일을 도우고 배우며 탐욕에 눈을 뜨게 된다. 애욕과 탐욕에 빠진 그 삶에 싫증을 느끼게 되면서 드디어 다시 길을 떠난다. 뱃사공을 만나 사공 노릇을 하며 자연의 소리, 강물의 소리를 듣는 방법을 배우며 지혜의 눈을 뜨게 된다. 카말라와 그녀와 함께 온 자신의 아들을 만나게 된다. 카말라는 죽음을 맞이하고 아들은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삶의 태도로 살아가며 싯다르타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들은 원래 있었던 돌아가고 싯다르타는 아들과 헤어지며 다시 뱃사공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천천히 혜안을 뜨기 시작하며 사공으로 살아간다. 그의 삶은 단 한순간도 지혜를 구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혜를 얻기 위해 자신을 애욕과 탐욕으로 던져버리고, 다시 자신을 그 두 가지의 늪에서 끌어올린다. 연꽃 같은 삶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내게는 비슷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태어나서 일하고 사랑하고 모든 갈등과 욕심에서 벗어나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네 삶의 모습과 대동소이하다. 삶의 모습은 한순간 또는 한 단면에서 바라보면 다를지 몰라도, 멀리서 긴 시간의 프레임 속에서 바라보면 거의 같은 모습이다. 집의 외양이 아무리 다르고 크기 차이가 있다고 해도, 우주에서 바라본 집의 모양은 아주 작은 점 하나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삶 속에 불어넣으면 그다지 웃을 일도, 울을 일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상의 순간순간마다 울고불고, 괴롭다고 난리 치고, 하나라도 더 움켜쥐려고 안달하고, 애증과 갈등으로 괴로워하며 귀한 하루하루를 낭비하고 살아간다.

 

 두 주인공은 우리에게 하나의 화두를 던지고 있다. “왜 태어났으며, 소명은 무엇인가? “라는 화두이다. 아무리 많은 일을 성취한다고 해도 자신의 소명을 모르거나 따르지 않는 삶은 무의미한 삶이다. 스토너는 교수로서의 삶을 아주 훌륭하게 살아오며 제자들을 위해 자신의 열정을 바치며 살아왔다. 싯다르타는 수행자로서의 삶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기 위한 노력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삶의 지혜는, 깨달음은 산속에 홀로 앉아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삶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교수로서의 삶, 수행자로서의 삶이 이들의 소명이고 태어난 이유이며 존재의 이유이다. 이 둘은 그런 면에서 매우 훌륭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석가탄신일이 다가온다인왕산 둘레길에서 바라본 사찰의 모습과 연등 행렬이 온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를 잠재우고 있다산속의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사찰을 보며 마음속 여유를 되찾고 세상으로 돌아가 그 여유로움을 나눈다부처님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堤下化衆生)’이라고 할 수 있다깨달음을 얻은 후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나 혼자만의 깨달음에 만족하는 삶은 그저 이기심에 불과하다자신이 알고 있는 좋은 것들을 나누는 것이 부처님 마음이다깨달음의 종류는 다양하다요리사에게 음식이미화원에게는 청소가스토너에게는 가르침이싯다르타에게는 뱃사공이 깨달음의 방편이자 깨달음 그 자체이다깨달음은 모두 나누는 것을 전제로 한다하지만 이런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다깨닫게 되면 저절로 나누고자 하는 연민의 마음이 올라오게 되어 있기에 나누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조건은 사족에 불과하다나의 삶도 스토너나 싯다르타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우리네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나에게 깨달음의 방편은 무엇일까아마 걷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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