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와 거리: 20210228 - 20210301 19km
코스: 불광천 – 메타세콰이어길 – 노을공원 – 난지천 공원 외
누적거리: 3,296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아침부터 차분하게 비가 내린다. 옷을 챙겨 입고 밖에 나오니 빗줄기가 제법 굵다. 지난 삼일 간 사위와 손녀가 집에 머물다 오늘 아침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 딸아이가 산후 조리원에서 돌아오는 날이다. 몸조리를 잘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손주가 태어나면서 모든 가족들이 행복한 비상 체제에 들어갔다. 딸과 손주는 산후 조리원에, 우리 부부는 딸아이 집과 우리 집을 왕복했고, 사위는 업무 마친 후에 딸을 돌보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지난 며칠은 사위와 손녀가 우리 집으로 와서 함께 지냈다. 사위 혼자 손녀 돌보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말도 못 하고 혼자서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손자가 태어나면서 각자 저절로 역할 분담을 하며 바쁘게 보냈다. 가족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가족 간에 끈끈한 정이 생겨나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우산을 쓰고 길을 걷는데 가끔 손녀와 함께 불렀던 노래를 마음속으로 부르고 있는 나 자신이 낯설기도 하다. 그때마다 손녀가 생각난다. 아침에 보냈는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손녀 생각이 난다. 사위와 손녀를 보낸 후 뒤돌아 서는데 허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야 할아버지가 된 느낌이다. 딸과 사위를 생각하면 짠한 마음이 올라온다. 오늘 네 명의 가족이 드디어 완전한 합체가 된다. 딸 부부, 손녀, 그리고 막 태어난 손자. 앞으로 그들이 겪어야 할 육아 전쟁이 그려진다. 사위는 회사 일로 바쁠 것이고, 딸은 집에서 두 명의 어린애들을 돌보느라 정신없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매주 두어 번씩 들릴 생각이지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서로 필요할 때 도우며 살아가고, 그런 추억이 쌓여서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고, 우리는 나이 들어서 손주들의 성장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불광천에 오랜만에 물이 힘차게 흐르고 있다. 늘 잿빛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개천을 보며 걸을 때 삭막한 느낌이 들었는데, 빗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니 개천이 살아나고 활력이 느껴진다. 힘차게 흐르는 개천 물 중간중간에 두루미 같은 새들이 우아하게 서서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기도 한다. 가끔 쓰레기 더미들이 몰려서 내려오기도 한다. 일부 구간에서는 좋지 않은 냄새가 나서 빨리 걷기도 한다. 불광천에 깔려있는 도보에도 물이 차서 가끔은 건너뛰기를 하며 물을 밟지 않으려고 하지만, 결국 트레킹화는 물에 흠뻑 젖으며 발이 젖기 시작한다. 일단 발이 젖으면 그다음부터는 건너뛰는 일이 저절로 사라지고 오히려 물구덩이를 찾아 밟고 다니기도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발로 물장구를 치며 혼자 쾌재를 부르기도 한다.
이런 장난이 지칠 때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빗소리 명상을 한다. 빗소리, 새소리, 차가 지나가는 소리 등이 각자 소리를 낸다. 빗소리에 집중하면 다른 소리들은 나지만 들리지는 않는다. 의식을 확립하지 않으면 소리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의식을 집중하면 소리가 들리고,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경치와 꽃을 볼 수가 있다. 마음을 모으지 않는 한 온갖 자연의 소리와 모습을 느낄 수가 없다. 같은 길을 걸어도 보고 느끼고 들은 내용이 다르다. 우리가 같은 상황을 다르게 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자신이 관심을 갖고 집중하고 있는 것들만 보고, 듣고, 냄새 맡을 수 있다. 또한 의식을 집중하지 않고 언행을 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이미 언행은 엎어진 물이 되어 버린다. 외부 자극에 자신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다. 과거의 경험과 기억들이 현재의 자신을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여기 머무는 의식적인 연습이 매우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잠식하게 되고, 현재를 살고 있지만 실제로는 과거나 미래에 살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면접 봤던 내용, 책 발간을 준비하고 내용, 사위와 함께 얘기했던 주식 투자 얘기, 칠순 기념 미얀마 수행 센터에서 수행하고 싶다는 염원, 코리아 둘레길을 모두 걷고 싶다는 생각, 매일 하고 있는 루틴, 걷기 학교 운영 방법 등에 관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 차리고 빗소리에 집중하거나 나무 가지에 맺힌 물방울을 바라보기도 했고, 비로 인한 약한 운무가 있는 길 사진을 찍기도 했다. 걸으면서 참 많은 일을 한다. 비 오는 날 3시간 정도에 걸쳐 13km 정도를 걸었다. 천천히 여유롭게 홀로 걷는 한가로움이 좋다. 사람도 거의 없으니 마스크를 벗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돌아오는 길에 불광천에 수위가 올라가서 개천 진입 통제를 하고 있다. 그새 수위가 많이 올라온 것이다.
집에 돌아오니 다행스럽게도 손녀가 동생인 손자를 잘 돌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벌써 누나 노릇을 하고 있다. 사랑을 아무리 받아도 더 받고 싶은 만 세 살도 재 되지 않은 아이가 누나 노릇을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그저 기쁘지만은 않다. 우리 부부가 큰아이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어야 할 것 같다. 동생을 인식하고 돌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니 기특하기도 하다. 지금 힘든 시간을 잘 보내면 나중에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위와 딸, 그리고 두 아이들이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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