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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168] 시시포스 Sisyphus

by 걷고 2021. 1. 27.

날짜와 거리: 20210126  3km

코스: 일상 속 걷기

누적거리: 3,072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하루 종일 상담 다섯 사례를 진행하는 날이다. 경험 상 하루에 최대 네 사례 정도까지는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오전에 두 사례, 오후에 두 사례 정도가 상담을 진행하는데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내담자와 상담사의 시간 매칭과 상담실 상황 등을 고려해서 상담 배정이 이루어지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담당자에게 하루에 세 사례 이상 배정되지 않도록 요청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담자가 한꺼번에 몰려서 상담을 신청하게 되면 담당자 입장에서는 그 상담사만을 위해 사례를 조정하는 배려를 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사설 상담 센터가 아닌 정부 위탁 상담 센터의 경우에는 특히 내담자의 민원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서울 심리 지원 서남 센터는 서울시에서 위탁받아 상담을 진행하고 있는 센터이다. 내담자가 상담 지연에 따른 불만을 시청에 민원으로 제기하면, 시청에서는 센터에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오전 10시와 11시에 상담 두 사례를 진행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니 오후 1시가 조금 지났다.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상담 두 사례가 있어서, 점심 식사를 거르고 차 한잔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 차 한잔 마시는 시간이 참 소중하다. 4시에 상담 마치고 보고서 작성하니 오후 5시 정도. 저녁 7시에 오늘의 마지막 상담이 있다. 두 시간 정도의 여유 시간이 있어서 글 한 편 쓴 후에 저녁 식사를 위해 센터를 나왔다. 오늘 아침 9시 조금 넘어 센터에 들어간 후 처음 바깥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다.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그런 어둠 속에서 바람을 쐬며 걷는 것도 기분 전환에 좋다.

 

운동도 할 겸 멀리까지 걸어가서 식당을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비가 조금 내려서 생각을 바꿔 늘 가던 순댓국 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에 식사 대신 센터에 준비된 과자를 몇 개 집어 먹었더니 입안이 개운치 않고 속도 더부룩한 느낌이 나서 뜨끈한 국물이 생각났다. 근처 식당보다는 깔끔한 분위기의 식당이고 주인과 종업원들이 편안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기에 이 식당을 자주 가는 편이다. 센터 바로 옆 건물에 자그마한 김밥 집이 있는데, 주인장의 인심이 고약하다. 김발 한 줄 먹고자 하는 손님은 자리에 앉을 수 없고 사서 들고나가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는 그 식당으로 발길이 가지 않는다.

 

저녁 식사 후 주변 조용한 주택가를 조금 걸었다. 대로변은 차 지나가는 소리와 길가에 즐비한 각종 안내판으로 정신이 없다. 조금 어둡긴 하지만 조용한 주택가를 걸으며 짧은 순간이지만 세상과 단절된 느낌과 함께 고요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산길이나 유명 트레일만이 걷기에 좋은 길이 아니다. 상황에 맞춰 주변에 자신이 걷고자 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면 이 길이 그 시간에 가장 좋은 길이 된다. 어둠 속 가로등이 켜진 주택가를 걷는 것은 뜻밖의 고요함과 조용한 기쁨을 선물해 준다. 젊은 친구들 서너 명이 떠들며 걸어오고 있다. 고요한 순간이 깨지면서 센터로 돌아왔다. 

 

저녁 7시에 마지막 상담이 시작되었다. 오늘 상담이 종결되는 사례다. 상담을 통해 일어난 변화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 종결 후 예상되는 어려움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서남센터에서는 4회기까지 상담을 진행하지만, 상황에 따라 8회기까지 연장해서 진행할 수 있다. 이 내담자는 오늘이 마지막 회기인 8회기 상담으로 두 달간 한 번도 시간을 어기지 않고 상담을 받은 성실한 내담자이다. 내담자가 다양하고 많은 내담자를 만나지만 가끔은 마음이 쓰이는 내담자도 있다. 특히나 종결 시점에 눈물을 보이는 내담자를 보면 나 역시 마음이 짠해지기도 한다. 건강한 삶을 위한 건강한 이별은 의미 있는 일이다. 

나도 센터와 헤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모든 상담이 1월 내로 종결되고, 그 시점이 되면 나 역시 자연스럽게 계약 해지가 된다. 센터에서는 4월에 상담사를 1년 계약으로 다시 채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상담을 진행했던 상담사도 지원을 할 수 있고, 면접을 통해 당락이 결정될 것이라고 한다. 3년간 이 센터에서 상담을 진행해왔다. 매년 이런 과정을 반복해왔다. 상담사가 크게 실수한 것이 없다면 자연스럽게 계약이 연장되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이런 상황이 불편하다. 지원 여부는 나의 결정이고, 채용 여부는 센터의 결정이다. 따를 수밖에 없다.

 

안정된 상황에서 상담을 진행하고 싶지만 그럴 기회가 생기지 않았고, 나이 들어가면서 앞으로는 점점 더 기회가 줄어들 것이다. 나이에 비해 상담 경력이 짧은 남성 상담사를 선호하는 센터가 없다. 상담 학회에 올라온 공지를 보고 몇 군데 지원을 했다. 크게 기대는 하지 않지만, 일단 지원은 했다. ‘서울 소방 심리지원단’에 지원했다. 이 센터는 소방사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상담을 하는 곳으로, 서울 시내 소방서를 찾아다니며 상담을 진행한다고 들었다. 체력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쉽지 않다고 들었다. 젊은 사람들 보나 내가 더 오래 꾸준히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지원했다. 남성이라는 점과 살아온 경험들이 소방사들을 상담 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두 곳은 경기도에 위치한 센터로, 이동 거리가 있어서 다른 상담사들이 쉽게 지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지원했다.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불편해하고, 지원하기 꺼려하는 곳이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상담사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언제까지 이런 일들을 반복하며 살 수는 없다. 가능하면 안정된 센터에서 지속적으로 안정된 상담을 진행하고 싶다. 2012년에 대학원에 입학해서 수련 과정을 포함하여 9년 차 상담을 진행하고 공부하고 있다. 어떤 선배 상담사는 10년은 견뎌야 기회가 올 수 있다고 했다. 만 10년이 되려면 내년 말까지는 어딘가에서 꾸준히 상담을 계속해서 진행해야 한다. 멀리 생각하기 말고, 금년 상담할 곳을 찾아보자. 비록 그 반복된 과정이 짜증 나고 불편하고 힘이 들더라도. 내담자 한 분 한 분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고 최선을 다해 상담하고 상담 공부를 꾸준히 하며 견뎌보자. 

 

매년 상담 센터에 반복적으로 지원하는 나의 모습이 마치 시시포스 Sisyphus 같다. 못된 짓을 한 형벌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면 다시 바위는 아래로 굴러 떨어져 영원히 이 작업을 되풀이하는 사람. 하지만 반복적으로 지원하는 일이 그렇게 고되거나 힘들지는 않다. 다만 반복된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인해 마음이 조금 불편할 뿐이다. 서남 센터 면접에도 지원할 생각이다. 그간 1,000 곳 이상의 센터에 지원해 봤기에, 어느 곳에 지원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판단은 있다. 매일 구인 공고를 보며 지원할 만한 곳을 골라 지원하고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내가 매일 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다. 루틴을 지키며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상담 외에도 책 발간 작업 준비를 하고 있고, 걷기와 글쓰기를 매일 하고 있으며, 걷기 학교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구체화되어가고 있다. 개인 상담 센터를 오픈하지는 않겠지만, SNS에 개인상담 안내를 올렸고 한 서점 내에서 개인 상담을 진행하는 것도 논의 중에 있다.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며 나아가고 있다. 상담사로서 전문성을 높이는 공부를 꾸준히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우리네 삶은 모두 시시포스와 같다. 거부하거나 부정할 필요 없이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오늘 할 일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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