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232] 소금길
날짜와 거리: 20210608 12km
코스: 홍제천 – 월드컵공원 – 난지천 공원 – 문화비축기지 – 불광천
평균 속도: 4km
누적거리: 4,116 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더위를 먹었는지 두통이 삼 일째 지속되고 있다. 심하지 않아서 버틸만하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다. 두통약을 먹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약에 의지하는 것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그냥 견뎌 보기로 했다. 아침에 병원에 들려 혈압약을 처방받은 후 홍제천부터 걷기 시작했다. 걸을 때는 두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개천 정리하시는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고, 근처 운동 기구에는 한가하게 운동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개천 정리를 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연세가 많으신 분들로 아마 노인 복지를 위한 방편으로 일용 고용직인 것 같다. 일자리는 늘었는데, 모두 힘들다고 한다. 복지도 좋지만, 제대로 된 일자리를 확보해서 청년들이 활기차게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길 희망해 본다.
‘소금길’ (레이너 윈 저)을 읽었다. 제법 두께가 있는 책이지만, 한번 손에 잡으면 내려놓기가 싫다. 친구의 권유로 투자한 것이 발단이 되어 갑자기 집을 잃게 된다. 두 아이들은 외지에 나가 공부하느라 부모를 도울 형편이 되지 않는다. 손에는 불과 몇만 원 정도의 현금밖에 없다. 부부는 50세 정도이다. 집을 압류하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집안 한 구석에 숨어있다가 SWCP (South West Coast Path)라는 책을 발견하며 그 길을 걷기로 결정한다. 더군다나 남편은 병이 있어서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일어나는 것조차 힘든 상태이다. 의사는 쉬고, 약 먹고, 먼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가슴에 쐐기를 박는다.
남아있는 살림을 정리하고 텐트, 배낭, 가스버너 등 필요한 물품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한다. 글의 내용으로 봐서 이 부부는 걷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거나 많이 걸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무작정 1,000km에 달하는 거리를 텐트 속에서 지내며 걷기로 한 것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머물 곳 조차 없으며, 뭘 해야 하는지 조차 모른 채 무조건 걷기로 한 것이다. 몸이 불편한 남편과 함께 걸으며 민박할 돈도 없고, 음식을 충분히 사 먹을 돈도 없는 상태에서 걷는 것이다. 노숙자와 이 부부의 차이점이라면 노숙자는 한 곳에 머물며 무료급식소를 찾아다니거나, 술과 약에 취해 사는데 반해, 이 부부는 끊임없이 걷고 움직이며 힘든 상황을 버텨내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무기력에 빠지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중독에 빠지게 된다. 암흑 같은 터널이 끝이 보이고, 언젠가는 밝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견뎌낼 용기와 힘을 억지로라도 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고, 막막하기만 한 상황에서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순간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그것도 하루아침에 노숙자가 된 중년 부부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은 지옥이거나 암흑이거나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는 깊은 땅굴 같은 세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부부는 서로 의지하며 몇만 원 밖에 되지 않는 기초 연금에 맞춰 부식을 사고 입에 풀칠하면서도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좋은 시설이 구비된 유료 캠핑장에 텐트를 치는 것조차도 이들의 경제적 상황에서는 허락되지 않는다. 음식점의 맛난 음식을 구경하다 쫓겨나기도 하고, 남의 땅에 몰래 텐트를 치다 도망 다니기도 한다. 해변에 따라 만들어진 바위와 소로를 따라 걷는 SWCP를 걸으며 비를 만나기도 하고 강한 파도로 인해 텐트를 야밤에 이동시켜야만 하는 상황도 맞이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걷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걷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나, 할 일이 없기에 걸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걸으며 남편의 몸 상태가 호전이 되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감을 느끼며 서서히 내면의 힘이 생기기 시작한다. 부부는 더욱 강한 사랑과 신뢰로 하나가 되어 가며 서로의 의지처가 되기도 한다. 자신들이 먹을 음식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노숙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먹거리를 나눠주는 따뜻한 마음도 지니고 있다. 나라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을 발간한 후 저자는 스타 작가가 되었고, 남편은 늦은 나이에 대학에 진학해서 아마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덕분에 저절로 이 부부는 인생 2막이 자연스럽게 열리게 된 것이다. 이들의 용기와 포기할 줄 모르는 인내, 힘든 상황을 함께 극복하는 부부애, 걸으며 자연과 하나 됨을 느끼는 지혜는 책을 읽는 내내 내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부부는 걷기를 통해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지혜를 터득하며 평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절망 속에 신음하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책을 읽으며 이들이 걸은 길을 상상하며 함께 걸었다. 이 길을 걷고 싶다. 언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마음속으로 희망의 싹을 키울 생각이다. 이 부부의 멋진 인생을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