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217]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날짜와 거리: 20210510
코스: n/a
평균 속도: n/a
누적거리: 3,878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들은 1939년 10월부터 하리코프 근교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 처음에 4,000명이었는데, 처형과 노역에 의해 마지막의 라조베츠의 수용소에 남은 숫자는 불과 79명이었다. 그들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지적(知的) 행위를 했다. 유제프 차프스키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의했다. ….... 그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정신세계와 예술을 토론하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자신이 인간이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증거 해줄 수 있는, 하루 중 유일한 시간이었다. … 먹고살기 위한 공부는 한 차원 아래의 공부다. 진짜 공부는 써먹을 데가 없을 때에, 쓸 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는 것이다. 시간이 남아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억지로 시간을 쪼개어하는 공부다… 전쟁은 끝났고, 그들은 살아남았다. 그때 강의 기록은 저자의 감동적인 서문과 함께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리는 이름의 책으로 남아있다.” (박종호의 문화 일류, 조선일보 20210510)
이 기사를 읽으며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흔히 얘기하는 ‘뻘 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음 한편에 쌓여있었던 의문과 회의, 그리고 약간의 무기력이 사라졌다. 지금 하고 있는 방식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허락을 받은 느낌이 들어서 오래된 심리적 체증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약간의 불안감과 불편함을 남아있지만, 그 정도를 견뎌낼 근육은 갖고 있기에 평생 안고 살아가도 무리가 없다. 불안과 불편이 없는 삶은 오히려 무기력해질 수가 있다. 이들은 삶의 장애물이 아니다. 삶의 일부이고, 자신의 그림자이다. 이들 이면에는 편안함과 평온함이 항상 같이 존재하고 있다.
가장으로서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이 늘 마음속 큰 짐이다. 물론 지금처럼 아껴 쓰고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다면 굳이 돈을 벌지 않아도 먹고사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사치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고, 아껴 쓰는 것은 몸에 많이 배어있다. 불편함은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부담감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안 속에서도 삶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편한 구석도 있다. 명상, 걷기, 글쓰기, 독서를 하며 하루하루 알차게 보내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오히려 만족스러운 구석도 있다. 하지만 아내가 경제적인 이유로 가끔 불안해하거나, 너무 아끼거나, 개인적인 삶을 축소시키려 할 때 느껴지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이 생각은 나의 불안이 투사된 것일 수도 있다. 건강을 잘 지켜나가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라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말을 하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며 그 말이 허공 속에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런 말도 앞으로 안 하려고 한다. 하고 나며 오히려 마음이 허전할 경우가 많다.
참석 인원이 적어서 대면 강의가 취소됐다는 연락을 받고도 담담했던 이유 중 하나는 돈 몇 푼 벌기 위해 하루를 낭비하는 것보다는 그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의하는 것이 단순히 돈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시키려 하지만, 만약 충분한 돈이 있다면 강의를 하려고 그만큼 애쓰고 노력했을까라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가 없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서 굳이 강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할 수 있는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유는 굳이 돈벌이가 되지 않은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상담을 계속하고자 하는 이유도, 심신 치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려는 생각도, 걷기 학교를 만들려는 생각도, 글을 쓰고 sns를 열심히 하는 이유도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면서 또한 돈 벌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갈등은 평생 안고 갈 수도 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런 갈등이 저절로 해소될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 독서, 글쓰기, 명상, 걷기, 을 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매일, 매 순간 던지고 있다. 어떤 날을 ‘그렇다’라고 확신에 차서 대답을 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돈벌이도 되지 않는데 꼭 해야 되나?’라는 회의에 찬 대답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계속하고 있다. “왜 그렇게 꾸준히 열심히 돈도 되지 않는 일을 하는가?” 또는 “왜 그렇게 바쁘고 피곤하게 살아가는가?”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답은 늘 한결같다. “이 일 말고는 별 달리 할 일도 없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무기력해지니까. 그리고 억지로라도 할 일을 만들어야 게을러지지 않으니까. 할 일을 스스로 만들어하고, 그 일이 나중에 나의 삶에 도움이 되길 바라니까. 또한 그 일이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지적인 행동으로 죽음과 미래의 불안, 불확실성을 견뎌냈던 폴란드 장교의 예기는 큰 힘이 되었다. 먹고살기 위한 공부가 아닌 써먹을 데가 없는데도 억지로 시간을 내어 공부한다는 것이 삶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방법이라는 말이 가슴에 뜨겁게 와 닿는다. 그렇다, 나는 지금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매 순간 불안 속에서 버티며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설득하고 동시에 의문을 품었던 지금 삶의 방법과 태도가 역사 속 인물들의 경험을 통해서 검증되었다. 도서관에 가서 이 책을 빨리 빌려서 읽어봐야겠다. 지금 코로나로 또 개인적인 상황으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 책이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