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옹지마(塞翁之馬) >
아내가 딸네 가는 날이다. 오전 5시에 일어나 5시 반경 출발한다. 같이 일어나 짐을 들고 차에 실어주는 일을 하며 배웅을 하는데, 오늘 아침에는 못했다. 그 시간에 깨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아내가 곤히 자는 나를 깨우지 않고 그냥 출발한 것이다. 집에서 놀고 쉬면서 잠에 취해 짐을 거들어 주지 못해 많이 미안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전화를 하니 이미 딸네서 아이들 아침 챙겨주며 식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내 아침 식사 걱정을 하니 더욱 미안했다.
아침 식사 후 코로나 예방 접종을 맞기 위해 병원 몇 군데 전화를 했는데, 백신이 없다고 한다. 보건소에 전화를 해서 확인해 보니 접종 가능한 병원 몇 군데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집에서 병원까지 약 30분 정도 걸어가서 코로나 예방 접종을 맞았다. 아내에게 접종 여부를 물어보았다. 딸네 주변 병원 사정도 비슷하다. 백신이 내일 들어올 계획이라며 전화한 후 찾아오라고 했다고 한다. 65세 이상은 반드시 맞으라고 하면서 정작 필요한 백신 공급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이발소에 들려 이발을 했다. 집에 돌아와 한 시간 정도 명상을 한 후 아내가 차려 준 음식을 꺼내어 점심 식사를 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면서도 가끔은 불편하다. 아내가 딸네 가서 고생하는 모습도 불편하다. 물론 아내는 딸네 가서 자신의 역할을 하며 활력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 면도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고생한다는 생각을 하면 괜히 딸과 사위가 미워지기도 한다. 또한 집에 혼자 머물며 편안하게 할 일을 하는 즐거움과 홀가분한 점도 좋지만,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홀로 지내는 것이 불편하고,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괜히 기분이 다운되기도 한다. 집에 혼자 머물며 시간을 헛되이 쓰거나 무의미하게 보내면 괜히 아내에게 미안해지기도 한다.
다시 좌복에 앉아 명상을 한다. 명상 마친 후 우두커니 집안을 둘러본다. 그리고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걷기 명상을 한다. 걷기 명상이라기보다는 어슬렁거림이다. 천천히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30여 분간 걷는다. 냉장고 옆에 붙어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처남 대학교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이다. 처남도 작년에 환갑을 맞이했으니 족히 30여 년은 지난 사진이다. 사진 속 장인어른 모습이 무척 젊어 보인다.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이다. 장모님 얼굴도 매우 젊고 활기차 보이는데 요즘은 무척 힘들어하신다. 처남의 앳된 얼굴은 지금 나처럼 쭈굴쭈굴하다. 세월은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냉장고 벽면 다른 곳에 영화 ‘Perfect Days’의 포스터가 걸려있다. 영화 포스터를 보며 영화 장면이 떠오른다. 화장실 청소, 독서, 음악 감상, 시장에서 술 한잔 하기, 공원에서 점심 식사하며 사진 찍기 등. 주인공은 청소를 하며 자신의 할 일을 하고 돈을 번다. 그는 매일 아침 누군가가 집 밖을 쓸고 있는 빗자루질 소리를 듣고 기상한다. 그 빗자루질 소리가 지금도 귀에 맴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운전을 하며 엷게 웃고 우는 장면도 기억난다. 인생은 희극과 비극의 끊임없는 반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의 삶은 무척 단순하다. 특별히 추구하는 것도 없다. 자신만의 루틴으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무언가를 이루려 하거나 채우려 하지도 않는다. 그냥 주어진 하루하루를 수용하며 자신만의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에게 매일매일은 완벽한 하루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채우려 살고 있는가? 또는 추구하는 바 없이 무엇을 비우며 살고 있는가? 때로는 채우지 못해 안달하고, 때로는 비우지 못해 안달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무언가를 추구하며 소명 의식을 갖고 살다가, 때로는 이 조차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그냥 하루를 살아가기도 한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여전히 이 갈등 속에서 살고 있다. 이 갈등이 언제나 사라질 수 있을까? 채움은 자기 이상화와 결핍감이 만들어 낸 욕심이다. 비움은 이 둘이 사라진 평온함이다.
길을 걸으며 조금씩 비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하지면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은 남아있고, 내면의 부정적인 사고와 시각도 갖고 있다. 과거와 비교해 보면 조금 나아진 면도 있지만, 오랜 기간 쌓인 업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데 베란다에 있는 화초 향기가 바람 따라 들어온다. 가만히 그 향기를 맡는다. 향긋하고 마음이 느긋해진다. 갑자기 불완전하고, 결핍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모두 완벽한 하루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좋고 싫고를 분별하지 않고, 주어진 하루를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모든 날이 완벽한 하루가 아닐까? 불완전한 하루가 완벽한 하루이고, 결핍이 있는 하루가 결핍을 지우는 하루가 된다. 이미 완벽한 하루에 스스로 상처를 내어 불완전한 하루를 만들고, 그 상처를 치료하며 완벽한 하루를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좋은 일도 나쁜 일이 되기도 하고, 나쁜 일도 좋은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면 된다. 오늘도 좋은 날이고 동시에 좋지 않은 날이다. 오늘도 완벽한 하루이고 동시에 불완전한 하루다. 인생은 새옹지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