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오늘 해파랑길을 걷는 중간에 잠시 길가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을 보며 우리 모두 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열심히 길을 걸으며 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전시회 준비와 관람객을 맞이하며 지친 몸을 이끌고 나와 걷는 사람도 있다. 평일 열심히 근무하며 주말을 이용해 걷는 사람도 있다. 사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걷는 사람도 있다. 인생 2막을 준비하며 그 길을 찾기 위해 걷는 사람도 있다. 삶의 후반부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 걷는 사람도 있다. 각자 목적은 다르지만 길을 걸으며 길 위에서 각자의 길을 찾는다는 공통점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들은 길을 걸으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다. 또한 길벗을 통해 길을 걸으며 길에서 삶의 지혜를 얻고, 자신의 모난 모습을 둥글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길과 길벗은 학교이자 동시에 스승이다.
길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생각하다 갑자기 떠오른 사람이 있다. 바로 고타마 싯다르타다. 그는 정반왕의 부인인 마야 부인이 친정에 아이를 낳으러 가다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났다. 길을 찾기 위해 길에서 수행하며 드디어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된다. 깨달음의 나무인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깨달음을 얻은 후 함께 출가했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 첫 설법을 한 곳이 사르나트다. 길에서 깨달은 후 길에서 첫 설법을 펼치셨다. 그리고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드셨다. 길에서 길을 찾고, 길을 찾은 후 길에서 법을 펼쳐 중생들에게 길을 보여 주시고, 길에서 열반에 드셨다. 그 당시 제자들과 모여 함께 수행했던 곳도 숲 속 사원이다. 사원이라고 해도 요즘과는 매우 다른 환경이었을 것이다. 우기를 피해 모여 수행하기 위해 안거를 보냈다고 하니, 겨우 비 피할 정도의 시설이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평생 길 위에서 사시며 중생을 위해 불법의 바퀴를 굴리셨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고, 그 제자는 다시 불법을 포교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불교가 4,000년 이상 종교로 자리 잡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부처님의 법도 있지만, 진리를 펼치는 방식이 일반 대중과 분리되지 않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 함께 지내며 삶의 모습 자체로 불법을 전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학문적으로 검증된 내용을 아닌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가르침의 기본은 스승의 일상 모습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들의 모습이 일상과 분리되거나 대중과 분리된다면 이는 참다운 가르침이 될 수 없다. 수행은 일상의 모습 속에서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만약 수행과 일상이 통합되지 않는다면 이는 죽은 공부를 한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일상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일상의 경계에 흔들리지 않고 주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길은 수행이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상황과 사람, 날씨 등은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며 자신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틀은 우리의 습관, 살아온 경험, 가정 문화, 사회적 인식 등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 틀을 더욱 강하게 만드느냐 아니면 틀을 부수며 약하게 만드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태도의 변화로 인해 또는 덕분에 우리는 불행해질 수도 있고, 행복해질 수도 있다. 자신의 틀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쉽게 충돌할 가능성이 높고, 또한 자신만이 맞다는 착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반면 자신의 틀을 부수면 만나는 사람과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내 집의 벽을 허물면 세상이 나의 집이 된다. 또한 자신의 틀을 깨는 통쾌함도 느낄 수도 있고, 틀을 깬 후 만나는 내면의 유연함과 본래 지니고 있었던 따뜻하고 다양한 모습을 스스로 발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무아’를 깨닫게 될 수도 있다. 또한 나의 틀이라는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날도 올 것이다. 나의 틀이 무상하고 틀 자체가 없다는, 즉 무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세상의 고통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오늘 길에서 앉아 쉬고 있는 길벗을 보며 그들은 아마 자신의 틀을 깨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틀을 깨야하는 필요성을 느낀 이유는 바로 틀 덕분에 삶을 살아왔지만, 그 틀 때문에 느끼는 힘든 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낙산사에 들려 관음보살님을 뵙고 왔다. 관음보살님은 세상의 모든 고통 소리를 듣고,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보살님이다. 관음보살님을 친견한 공덕으로 우리 모두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마음 모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