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둘레길

길을 걸으며 행복하기를

걷고 2025. 5. 25. 09:32

종일 비소식이 있는 날입니다. 차를 타고 가며 창가에 내리는 빗방울을 걱정스럽게 바라봅니다. 그리고 걱정은 수용으로 변합니다. 받아들이면 됩니다. 받아들이는 순간 걱정은 평온으로 바뀝니다. 차 안에서 범일님이 비닐로 만든 몸빼바지와 스패치를 나눠줍니다. 범일님, Thank you! 몇 명은 비닐 몸빼바지를, 몇 명은 비닐 스패츠를, 몇 명은 자신만의 패션을 유지한 채 걷습니다. 지난번 걷기 마친 지점으로 돌아가 걷기 시작합니다. 굳이 그 지점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지만, 우리는 그 지점에서 걷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습관이라기보다는 길에 대한 예의입니다. 한 구간이라도 걷지 않고 지나친다면 길에 대한 결례가 됩니다.

 

가랑비가 내립니다. 가랑비를 맞으며 걷는 재미가 가랑비에 옷 젖듯 우리를 걷기에 빠지게 합니다. 비는 조용히 차분히 내립니다. 바다도 조용합니다. 바다를 보며 걸은 지 꽤 오래되었지만 보면 볼수록 더욱 보고 싶어 집니다. 그래서 바다를 만나면 즐겁고 마음이 설렙니다. 알면 알수록 더욱 사랑스럽고 반갑고 즐겁습니다. 고기 맛을 본 사람만이 고기를 제대로 먹을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해변을 걸어본 사람만이 그 즐거움을 더욱 느낄 수 있습니다. 한번 바닷길을 걸어 본 사람은 바다를 더욱 그리워하고 찾게 됩니다. 해파랑길을 걸으며 우리는 바다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길벗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걷는 길벗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걷는 재미에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비 내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걷습니다. 하조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수평선은 끝없이 광활합니다. 그 광활함을 바라보며 마음을 넓히길 바랍니다. 산을 걸으며 호연지기를 키우듯,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의 뜰을 넓힙니다. 바다는 모든 것을 단지 수용합니다. 어떤 것들이 들어와도 그냥 포용합니다. 오물도, 선풍기도, 가라앉은 선박도 받아들입니다. 또한 바다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을 품습니다. 생물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가끔은 자체 정화작업을 합니다. 태풍과 쓰나미를 통해 하는 정화작업입니다. 홍수 끝난 후 해안가나 강가에 모인 쓰레기 더미를 보면 많이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바다는 좋다 싫다는 표현조차 하지 않습니다. 태풍은 바다에 들어온 오물들을 거부하는 반항이 아닌, 바다 스스로 살기 위한 자체 정화 작업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태풍을 거부합니다. 바다인 자연의 삶과 우리의 삶이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자연은 자연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우리는 우리의 모습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되는 날이 옵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임을.

 

길을 걷는데 산티아고 순례를 하고 있는 릿다님과 정희님이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제가 하룻밤 머물며 세족식을 받았던 그 성당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 사진을 보니 반갑고 그리운 추억이 떠오릅니다. 산티아고 길도 그립고, 성당도 그립고, 성당에서 만났던 신부님과 자원봉사자도 그립고, 온몸과 얼굴에 적의를 가득 품었던 사람이 세족식 후 어린양이 되었던 모습도 그립습니다. 그 두 분은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고, 우리는 해파랑길을 걷고 있습니다. 비록 길은 다르지만, 길은 모두 같습니다. 우리를 받아주는 자연입니다.

 

캠핑족과 서핑족, 스쿠바족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모두 일터를 떠나 자연에 와서 숨을 쉽니다. 그리고 힘을 얻고 다시 일터로 돌아갑니다. 그분과 우리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떠나기 위해 또 철수하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고 장비를 챙겨야 합니다. 우리는 떠나거나 돌아오거나 별로 챙길 물건이 없습니다. 그리고 걸으며 짐은 점점 줄어둡니다. 짐의 무게가 줄어들며 삶의 무게도 줄어듭니다. 요즘은 짐을 줄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불안으로 인해 이거 저거 챙기는 습관을 조금씩 없애려 합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을 많이 들고 다닙니다. 조금씩 가볍게 만들 생각입니다. 자연을 걸으며 비우는 지혜를 배우고, 그 지혜를 일상에서 활용하여 몸도 마음도 더욱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제가 걷는 이유입니다.

 

합정역 도착해서 오랜만에 소주잔을 기울입니다. 서로 하고 싶은 얘기도 하고 웃으며 즐겁게 대화를 이어갑니다. 알면 알수록 길벗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이해를 하면 할수록 서로 더욱 배려하고 존중하게 됩니다. 걷기학교는 비록 규약이나 규정집은 없지만, 기본에 충실하고 상식을 지키는 모임입니다. 기본과 상식이 무엇인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기본과 상식만 지킨다면 굳이 규정을 만들 필요조차 없어집니다. 걷기 위해 모인 모임이니 즐겁게 걸으면 됩니다. 그리고 걸으며 스스로 성찰하고, 길벗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걸으면 됩니다. 제 역할은 길을 열고 참가자의 편안함을 방해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어떤 간섭이나 제약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만의 편견과 아집과 습관이 있을 겁니다. 혹시나 불편함을 느낀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편안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되새기며, 또 저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말씀드리며 화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회원이 없는 모임은 국민이 없는 국가와 같습니다. 걷기학교는 작은 나라입니다. 저 혼자 살아가는 one man band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조심합니다. 회원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모임이 되길 바랍니다. 다만 적극적인 참여와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는 것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오래오래 같이 걸으면 좋겠습니다. 길을 걸으며 길과 길벗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사랑을 통해 우리 모두 삶의 질이 좋아지고 늘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길벗님들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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