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일기

< ‘나’로 살아가기 vs '나‘가 되어가기 >

걷고 2025. 5. 12. 10:34

과연 나는 지금 온전히 ‘나’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원하는 ‘나’가 되어가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잘 모르겠다. 편의상 ‘나로 살아가기’는 A로, ‘나가 되어가기’는 B로 칭한다. A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이미 ‘나’인데 굳이 A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이미 A를 하고 있다면 굳이 B가 될 필요가 있을까? A는 이미 B가 아닐까? 이미 '나'는 '나'인데 '나'가 되어간다는 논리는 모순이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뭔가가 깔끔하게 정돈이 안 된다.

A는 나를 인정하고, 지금의 A를 수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A는 굳이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비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A는 A로 살아가는 것이 맞고, A는 A로 살아가야 한다. 그런 A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고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낀다면 우스운 일이 된다. 다른 사람 역시 A1, A2, A3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굳이 A가 A1, 2, 3, 가 될 필요도 없다. vice versa!

B는 A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진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원래의 A와는 다른 A가 되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원하는 대로 된다면 행복해하고, 그렇지 않다면 불행해한다. 또는 야망과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삶의 목적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일반적인 우리의 모습이 B다. 야망과 꿈은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이루지 못할 경우에는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즉 A의 모습에 상처를 입히게 된다. 또는 A는 사라지고 B만 남아있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A와 B 사이의 혼란스러움을 그대로 둔 채 글을 쓰고 있다. 정답을 찾지 못했고, 어쩌면 정답이 없을 수도 있다. 또한 사람마다 살아온 과정과 경험이 다르기에 각자 다른 생각과 정답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이 글은 혼란스러움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혼란스러움을 나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의 일환으로 받아들이며 쓰고 있는 글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자신만의 생각과 의견을 주신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나의 길을 찾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무가 있다. 조각가가 있다. 조각가가 나무로 불상을 조각한다. 나무부처가 된다. 사람들은 나무부처 앞에 경배를 올린다. 조각가가 이번에는 나무로 창을 만든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또는 생존을 위한 무기를 만든다. 사람과 동물은 나무 창을 피해 다닌다. 나무는 A고, 조각가의 손에 만들어진 나무부처와 나무 창은 B다. 나무는 모두 나무다. 하지만 나무의 모습을 보며 나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다르다. 이것은 나무의 문제인가? 아니면 나무를 대하는 사람들의 문제인가? 아니면 나무를 조각하는 조각가의 문제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나 ‘너’나 모두 나무라는 사실을. 같은 나무끼리는 서로 비교하지 않는다.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만 생각이라는 놈이 나무를 비교하고, 값을 매기고, 우열을 가릴 뿐이다. 또한 나무를 갖고 불상을 만드는 놈이 있고, 창을 만드는 놈이 있을 뿐이다.

어떻든 ‘나’는 나무다. 이 사실은 진리다. 나무가 꽃이 될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같은 나무 사이에서 큰 나무가 작은 나무를 우습게 볼 필요도 없고, 작은 나무가 큰 나무를 우러러볼 필요도 없다. 때로는 큰 나무가 작은 나무에게 그늘을 제공하기도 하고, 작은 나무는 고마움으로 큰 나무에게 더 많은 양의 수분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크든 작든, 굵든 가느다라든, 활엽수건 침엽수건 나무는 나무일뿐이다.

나무로 부처를 만들고 창을 만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 부처가 없어졌다고, 창이 없어졌다고 울고불고할 일도 아니다. 평생 남 앞에 경배를 받아온 나무부처, 남이 피해 다니던 나무 창은 아무 죄가 없다. 다만 사람들이 부처라고, 창이라고 생각하고, 그 생각에 생명을 불어넣어 만들어진 이상한 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조각가의 문제인가? 그럴 수도 있다. 나무를 조각하는 조각가의 마음에 따라 나무는 부처가 되고, 창이 된다. A는 나무다. B는 나무부처 또는 나무 창이다. 그럼 조각가는 누구인가? 나는 이미 나무다. 나무는 부처가 될 수도 있고, 창이 될 수도 있고, 인형이 될 수도 있고, 집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무라는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A나 B를 구별할 필요가 저절로 없어진다. A가 나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한 B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무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형태만 바뀔 뿐이다. 나무부처, 나무 창, 나무집, 나무 사람 등으로. 우리는 형태에 속아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금강경에 나오는 경구가 있다. 만약 모든 형태나 모습을 그 형태나 모습으로 보지 않는다면 바로 부처를 볼 수 있다는 의미다. A=B인데 우리는 A=B가 아니기를 바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조각가를 죽여야 한다. 나무를 갖고 장난질하며 자신과 사람들을 속이는 조각가를 찾아 없애야 한다. 그 조각가가 누구인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며 얻은 큰 이득이 있다. 자신이 나무라는 진리를 확실하게 보게 되었다는 점. 하지만 나무에 조각하는 이상한 짓을 하는 놈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놈을 없애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근데 굳이 해야 할까? 어떤 형태로 보이든 나무는 나무라는 진리 한 가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그리고 볼 수 있다면, 모든 허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조각가가 아무리 장난질 쳐도 그냥 웃으며 내버려 둘 수 있지 않을까? 나무는 상처받지 않는다. 다만 조각가의 장난에 놀아나며 상처받았다고 스스로 착각을 할 뿐이다. 조각가의 칼질은 흐르는 강물을 가르는 무의미한 칼질에 불과할 뿐이다. 물은 흘러가며 칼질을 포용한다. 그리고 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듯 그냥 무심하게 흘러간다. 흘러간 물자리에 칼질의 흔적은 남아있지도 않다. 나무라는 진리만 제대로 보고 알고 있으면 된다. 그러면 A가 B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뭔 상관이랴? A가 되건 또는 B가 되건 ‘나’는 ‘나’다. 그리고 ‘나’가 나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체득하게 되면 모든 나무를 나와 동등하게 대하고 존중하게 된다. 그러면 된다. 굳이 B가 되기 위해 애쓸 필요조차 없다. ‘나’는 나무다. 그리고 모든 존재 역시 나무다.

아내는 딸네에 아침 일찍 갔고, 나는 명상하고 식사 후 커피를 한잔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다. 혼란스러움을 글로 쓰며 나름의 답을 찾게 되었다. 글이 나를 이끌어간다. 이게 나의 A이자 B다. 그리고 이제는 A, B를 모두 지우기로 했다. A와 B를 구별 짓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냥 나는 '나'이고 나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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