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삶
어제저녁에 된장찌개를 다시 끓여서 밥을 넣고 비볐는데, 여러 번 끓여서 그런지 매우 짜다. 다시 밥을 더 넣고 비비니 먹을만하다. 하지만 양이 너무 늘어나서 반 정도를 남겼다. 남은 밥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하다. 참치 캔도 하나 따서 반찬으로 먹었는데, 이 역시 반 정도 남았다. 일단 상하면 안 될 거 같아 남은 비빔밥과 참치캔을 창가에 올려놓았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조금 더 넣은 후 남은 참치를 넣고, 계란을 하나 깨서 가스레인지에 올려서 비볐다. 버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편이다. 그런데 막상 다 만들고 나서 보니 마치 리조토 같았고, 맛도 제법 괜찮았다. 성공적인 아침 식사를 뿌듯하게 마치고 당당하게 이 내용을 글로 쓰고 있다.
매끼 식사를 마친 후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가 귀찮아 매끼마다 하지 않아서 설거지가 큰일이 된 적이 있다. 그 이후부터는 아무리 사소한 설거지 거리라도 있으면 바로 한다. 이때 하는 설거지는 즐거움이고 재미지만, 이것이 쌓이면 큰일이 되고 작은 스트레스가 된다. 설거지를 마친 후 식탁을 깨끗하게 닦는다. 귀찮아서 자주 닦지 않으면 식탁이 지저분해지고, 그 지저분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 자신을 너무 하찮게 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매끼 식사 후 식탁을 닦는다. 나 스스로를 대접하기 위한 방편이다.
집에 홀로 있는 시간에는 음악을 늘 틀어놓는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 홀로 있다 보면 가끔 삭막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삭막함을 음악으로 중화시키며 마음의 풍요로움을 얻는다. 어제는 저녁에 음악을 틀으니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홀로 미친놈처럼 춤을 추었다. 음악은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알아서 듣는 것이 아니고, 사람 목소리가 나오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치이기에 춤추는 것을 매우 싫어하고 아예 하지 않는 편이다. 홀로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면서 동시에 흥미롭다.
이번 주는 목감기로 인해 홀로 집에 머물고 있다. 아내는 딸네에 가서 손주들 돌보고 있다. 가족 중 나만 홀로 남겨진 거 같아 가끔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홀가분함도 느낀다. 아무도 없는 집안은 아주 훌륭한 수행처가 된다. 하루 일과는 매우 단순하다. 아침에 명상하고, 아내가 준비해 놓은 식사를 하고, 신문 읽고, 글 쓰고, 아나빠나사띠 공부하고, 걷고, TV 뉴스를 보고, 시간이 나면 영화를 한 편 본다.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시간이 참 빠르다. 65세가 넘었으니 사회적으로는 노년에 속한다. 마음은 중년? 숫자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냥 나에게 맞춰 살아가면 된다.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면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이 두 가지의 경계가 무너진다. 즉 그냥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면 된다. 허비하듯 살아가면 후회가 남지만, 비록 남에게는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이런 활동을 꾸준히 하며 충실하게 살면 스스로 뿌듯하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사람과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혼자 있을 때는 혼자 살 수 있어야 하고, 무리 속에 있을 때는 무리와 잘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중 홀로서기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 무리 속에서 잘 화합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인생은 함께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다. 무리 속에 들어가는 것도, 또 함께 지내는 것도 홀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태어날 때 홀로 태어나듯, 죽을 때도 홀로 죽는다. 결국 인간은 혼자이고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인간이 지닌 실존적 이슈다. 하지만, 그 홀로서기를 통해 사회 속에서 살아갈 근육을 만들고, 무리 속에서 살면서 삶의 굳은살을 만들어 내고, 외로움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며 함께 살아갈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요즘 불교 공부하는 재미에 빠져 지내고 있다. 특히 아나빠나삿띠 (들숨 날숨에 마음 챙기는 수행법) 공부를 하는 것이 무척 재밌다. 이제야 글귀가 눈에 들어오고 이해가 된다. 그간 공부해 왔던 내용 중 혼란스러운 것들이 조금씩 정돈되고 있다. 관련된 책이 몇 권 있는데 모두 정독할 계획이다. 책을 읽으며 중요한 내용은 글로 정리하고 있다. 읽어도 머리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나빠나삿띠 관련 유튜브 강의도 듣고 있다. 한 6개월 정도 지나면 아나빠나삿띠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쯤 아나빠나삿띠 수행 모임을 하나 만들어 도반과 함께 공부하는 것도 구상 중이다. 홀로 공부한 것을 함께 나누며 홀로 또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노년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다.
오늘 신문을 보니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청년은 청년대로 실업 때문에 고민이 심해지고, 중년은 경제적 어려움, 노년은 외로움이 큰 고민거리라고 한다. 이로 인한 우울, 불안, 스트레스 수준이 매우 높다고 한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기에 어떤 정답을 내릴 수도, 줄 수도 없다. 하지만 아무리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이라도 그 안에서 살 길을 찾아낼 수 있다. 그 방법 중 한 가지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냥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와 아무 곳이나 걸으면 된다. 또는 걷기 동호회 가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 하면서 설레거나 행복한 일 등 지금 상황에서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루에 단 30분만이라도 하면서 마음의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 짧은 휴식이 마음속에 여유 공간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그 공간에 삶의 에너지가 천천히 모이게 된다. 그 공간은 샘이 되고, 에너지는 샘에 고인 샘물이다. 그 샘물이 언젠가는 넘쳐흐르며 자신의 갈 길을 알려주거나 할 일의 원동력이 된다.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은 “살아남는 것은 가장 강한 종도 가장 똑똑한 종도 아니고,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다.”라는 말을 했다. 빌 게이츠도 “나는 힘이 센 강자도 아니고, 두뇌가 뛰어난 천재도 아니다. 날마다 새롭게 변했을 뿐이다. 이것이 나의 비결이다.”라고 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춰 변화를 하며 적응하고 살아가는 것, 비록 그것이 청년이든, 중년이든, 노년이든, 이 삶의 지혜다.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고, 남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자신이 아님이라는 비동일시를 익히고, 나아가 변화를 받아들이는 종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살아가면 된다. 이제 세탁기와 건조기 사용법을 배우면 된다. 물론 어제 egg cooker에 계란을 삶을 때 시간을 잘못 맞춰 계란이 완숙도 아니고, 반숙도 아니게 되었지만, 실수를 통해서 또 배우고 적응해 나갈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노년의 삶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