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걷기는 삶의 짐을 지고 가는 소풍이다

걷고 2025. 3. 19. 00:39
 

출발 전부터 날씨가 신경이 쓰였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강원도 지방은 폭설이 온다고 하고, 기상청 날씨누리에 의하면 비와 눈 소식이 있다. 정동진역에 도착하니 비가 내린다. 참석자들의 상황도 일기예보처럼 변화무쌍하다. 바다님은 허리가 불편하고 범일님은 발목이 불편하다. 36코스는 약 9km 거리지만 해파랑길 전체 50개 구간 중 가장 난도가 높다고 한다. 두 분은 해안가를 따라 걷기로 결정하고, 세명은 원래 코스인 괘방산 코스를 택했다. 에단호크님은 가족들과 만나 정동진 역에서 안인해변까지 함께 걷고 저녁 식사 이후에 합류하기로 했다. 

 

운무가 가득한 괘방산 산길은 신령님이 사시는 신선계다. 그 길을 걸으며 우리도 신선이 된다. 아래에는 바다가 보이고 건너편에는 산이 구름에 가려 나타났다 사라진다. 산길이 험하거나 힘들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이미 험한 산길을 각오하고 산행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비가 조금 거세졌다 잦아지기를 반복한다. 산 아래에 보이는 해변의 풍경은 운무로 인해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신령스럽다. 산 중턱에 당집이 있다. 잠긴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산신령을 모셔 놓은 산신당이다. 이 산을 찾았으니 산 주인께 인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예의. 패러글라이딩 활강장에 올라 아래를 내려본다. 아찔하다. 괘방산 정상에서 비 맞은 모습으로 사진을 찍으며 웃는다. 비 오는 날 이런 험한 산길을 걷는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웃게 만든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떠서 창밖을 바라보니 파도가 거세고 폭설로 눈이 도로에 가득하다. 바람도 거세다. 하늘에서 45도 각도로 눈발이 흩날린다. 버스를 타고 보행 통제 구역을 벗어나 강동초등학교에서 하차 후 걷기 시작한다. 다행스럽게 강한 바람은 그쳤고 눈앞에 멋진 설경이 펼쳐진다. 어릴 적 보내고 받았던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오는 사진 풍경이다.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우리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해파랑길 강릉구간이며 바우길 7 구간인 눈이 가득한 산길을 걸으며 동심으로 돌아간다. 눈발이 날리거나 나무에 쌓인 눈이 눈비를 내린다. 햇빛이 나무 사이로 비치며 눈이 반짝인다. 어떤 발자국도 없는 길에 우리의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다. 우리는 마치 동화 속 주인공이 된 느낌이다.     

 

예서원팬션에 들어가 따뜻하게 몸을 녹이며 연잎밥을 주문했다. 사장님께서 칡과 누룩으로 직접 담은 발효주를 내오신다. 우리의 건배사인 ‘술’을 외치며 오전의 멋진 산행을 함께 축하한다. 근처에 테라로사 커피공장 강릉본점이 있다. 일부러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곳에 들어가 커피와 빵을 먹으며 기념사진도 찍었다. 신라시대 유물로 한국에서 가장 큰 화강석 굴산사지 당간지주를 쳐다보며 지나간다. 오전에 설산을 산행할 때는 눈이 쌓여 있어 걷기가 좋았지만, 오후가 되며 눈이 녹으니 길이 질퍽해서 걷기가 은근히 불편하다. 장현 저수지 둘레길을 걷는데 제법 저수지가 넓다. 시간은 오후 세시가 넘어가며 이제 서서히 길을 마칠 때가 되어간다. 길을 서둘러 걷는다. 마음이 급해진다. 생각지도 못한 복병인 모산봉을 넘는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발걸음이 무겁고 길은 끝날 듯 끝나지 않는다. 눈이 녹은 산길은 미끄럽다. 서로 의지하며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온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강릉 초당 순두부를 먹은 후 숙소에 돌아와 지금까지 해파랑길을 걸으며 느낀 점을 얘기하며 앞으로 갈 길에 대한 얘기도 나눈다. 해파랑길은 앞으로 수개월이면 마치게 된다. 벌써 아쉬운 마음이 들고 길이 끝나는 것이 아깝다. 남은 코스는 가능하면 많은 길벗이 동참해서 걸을 수 있도록 주말에 당일 코스로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4월부터는 월 2회 토요일에 진행할 계획이다. 해파랑길 끝난 후 'DMZ 평화의 길'을 에단호크님과 함께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각자 살아온 자신만의 스토리를 얘기하고 들으며 서로 격력하고 덕담도 나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길을 걸으며 길벗이 되고 도반이 되어간다. 이런 모습이 참 아름답다.   

   

드디어 마지막 날 아침 38코스 종점인 남항진 해변에서 거꾸로 걸으며 강릉 중앙시장에 도착했다. 날씨는 마지막 날도 변화무쌍하다. 햇빛이 났다가 눈발이 날렸다가 바람이 거세게 불기도 한다. 시장에 도착해서 커피숍에 들어가자마자 창밖에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마치 우리가 실내로 들어오길 기다렸다는 듯. 어제 길을 걷기 전에도 함박눈이 내렸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람도 사라지고 눈도 그쳤다. 덕분에 우리는 멋진 설산을 걸을 수 있었다. 그제 빗속에 괘방산을 걸을 때도 우리가 걷기에 알맞을 정도의 비가 내렸다. 이번 길은 비록 우리가 걸었지만 산이, 날씨가, 자연이, 강릉이 우리에게 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허락을 해 준 덕분에 편안하고 안전하고 즐겁게 걸을 수 있었다. 비록 걷는 사람은 우리지만, 자연의 도움과 배려가 없었다면 이 길을 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네 삶도 이와 같다. 각자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혼자서 한 일이 아니다. 주변의 모든 여건, 가족, 친구, 단체나 회사 등의 협조와 배려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고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이번 여정도 마찬가지다. 2박 3일간 편안하게 걸을 수 있고, 편안한 곳에서 쉬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허락과 배려를 해준 가족과 지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photo by 에단호크
 

에단호크님이 찍은 사진을 보는 순간 ‘쉼’이 떠올랐다. 길을 걷다가 배낭을 내려놓으며 쉰다. 이때 배낭은 짐이다. 집을 나서며 배낭을 짊어지고 나온다. 삶의 짐은 내려놓고 대신 배낭을 멘다. 이때 짐은 삶이고, 배낭은 쉼이다. 길을 걸으며 세상 근심을 내려놓는다. 짐은 근심이고, 걸음은 쉼이다. 걸으며 길벗이 쉼이 되기도 하고 짐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짐으로부터 자유롭고 해방되기 위해서 걷지만 때로는 짐이 더 무거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 걷고 또 걷는다. 무거움을 알면 가볍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누가 무겁게 만들었는지를 안다면 더욱 편안하고 가볍게 만들 수 있다. 삶의 짐의 무게는 모두 같다. 다만 그 짐의 무게를 느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를 뿐이다. 나는 가볍게 살고 싶다. 짐을 짊어지지 않고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짐이 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짐을 메고 천상병 시인이 말씀하신 소풍 가듯 살아가고 싶다. 따라서 내게 걷기는 삶의 짐을 지고 가는 소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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