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자신을 reset 하고 싶다 >
산티아고 걸을 때 미국 여성을 만나 잠시 함께 걸었던 적이 있다. 산티아고 온 이유를 물었다. “내 인생을 reset 하고 싶어서. 남편도 아프고, 아들도 아프다. 친구들도 모두 도시로 나가 있어서 만날 친구도 없다. 평생 간호사로 일해 왔는데, 가족이 모두 아프니 내 인생이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고, 다시 내 인생을 reset 하고 싶어서 왔다.” 그녀의 배낭은 덩치에 비해 너무 겄고, 한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었다. 걷는데 익숙하지 않은 그녀의 발바닥은 온통 물집 투성이었다. 고통 속에서도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가끔 길에서 그녀를 만날 때마다 짐이 줄어들고 배낭의 모습도 안정적으로 탄탄하게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오랫동안 입고 있었던 옷을 버렸다며 웃으며 얘기했다. 산티아고 도착 후 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이 완보했다는 사실을 전해왔다. 그녀는 성공했다. 지금 그녀는 reset 된 인생을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reset 단어가 떠오르며 그녀가 떠올랐다. reset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이유는 요즘 내면에 부정적인 모습을 자주 발견하고, 그런 나 자신을 reset 하고 싶어서다. 사람과 상황을 대하는 태도에서 부정적인 판단과 해석을 내리는 경우를 자주 깨닫게 된다. 원래부터 그래왔는지, 아니면 최근 들어 더 많이 느끼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때로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얘기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든 모든 순간 마음에 들 수는 없다. 어떤 상황도 또한 모두 마음에 맞을 수가 없다.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기대를 하고 실망을 하고 화를 낸다.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는 상황을 들여다보았다. 누군가가 나의 뜻과 다르거나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반응과 언행을 할 때 마음이 불편하다. 이는 나의 뜻을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상대방의 마음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나의 뜻과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를 바라는 욕심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통제하거나 나에게 조금이라도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면 화가 난다. 반면에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나의 뜻을 따르기를 강요하고 있고, 통제하려고 하고 있다. 이율배반적이다.
불교 경전 내용 중 ‘안팎으로 공부한다’라는 경구가 있다. 내가 이런 생각과 감정을 느끼듯,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는 것을 잘 알아차리고 공부하라는 의미다. 다른 사람들 역시 나의 언행과 반응을 보며 불편하고 화가 날 경우도 많을 것이다. 다만 서로 겉으로 그것을 꺼내어 시비를 하지 않을 뿐이다.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서 느끼는 모든 감정과 생각은 실은 그들, 사람이나 상황, 이 만든 것이 아니고, 내 안의 모습이 투사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예전에 평생 정신과 의사로 상담을 하신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분께서 두 가지를 당부하셨다. “내담자를 돈으로 보지 말아라, 투사를 늘 경계하라.” 시간이 지나며 그 선생님 말씀이 점점 더 선명하게 들린다.
불편하게 느끼는 감정은 모두 자신 내면의 모습이다. 단지 그 모습이 상대방이나 상황을 통해 드러날 뿐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또는 어떤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들을 탓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때가 바로 마음공부하기에 매우 좋은 기회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let go, 즉 흘려보내면 된다. 어떤 생각, 감정, 감각 등이 느껴질 때 반응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고 흘려보내면 된다. 지켜보면 잠시 머물다 흘러가듯 사라진다. 반응하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고, 지켜보는 것은 평온함을 되찾는 방법이다. 반응하는 것은 허상에 속는 것이고, 지켜보는 것은 본성을 찾고 확인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지켜보는 것이 불편하고 견디기 힘들 뿐이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 반응하지 않고 지켜보며 시간을 기다리면 된다. 생각, 감정, 감각 등 떠오른 모든 것은 환영일 뿐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불교에서는 탐진치(貪瞋痴)를 삼독(三毒)이라고 한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남이 나의 뜻에 따르기를 원하는 것은 욕심이다. 남을 통제하려는 생각도 욕심이다. 욕심이 충족되지 않으면 화가 난다. 욕심의 이면에는 어리석음이 있다. 현명한 사람은 남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늘 나의 뜻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또한 남 역시 나와 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통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가 아닌 나의 감정과 생각을 ‘나’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허상을 실상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삼독은 번뇌의 원인이다. 따라서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로 떠오른 생각, 감정, 감각을 붙잡고 씨름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것이다. 불편함을 견디고 인내하며 지켜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마음을 거울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거울 자체는 아무런 상(相)을 지니고 있지 않다. 다만 거울 앞에 나타난 형상을 비출 뿐이다. 이미 지난 형상을 잡을 수도 없고,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형상을 비출 수도 없다. 지난 일을 되돌릴 수도 없고, 오지도 않은 미래를 원하는 대로 만들 수도 없다. 내 안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어떤 것은 본성이고 어떤 것은 허상이다. 내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모습 중 허상을 제거하면 본성이 저절로 드러난다. 떠오른 모든 것은 허상이다. 이 허상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let go 하는 것이고, 그 방법이 바로 마음챙김, 알아차림, 명상이다. 내 안에서 내가 아닌 것을 제거하면 나 자신을 초기화하게 된다. 바로 reset이 된다. 영화의 화면을 끈 후 나타나는 흰 스크린을 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