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천리길

기러기 떼의 이동

걷고 2025. 2. 9. 10:15

인제천리길 4코스는 안개덕이길로 총 18.4km에 달하는 구간이다. 국내 최초의 람사르조약의 습지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대암산 용늪이 있다. 또한 습지 자연생테 탐방이 가능한 지역인 심적습원에서는 야생화뿐만 아니라 야생동물도 만날 수 있다. 이 길은 탐사 중에 엄마곰과 새끼곰 발자국을 발견하여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어제 눈길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큰 발자국을 보았다. 아마 곰이 아니었을까? 이번 여정은 전체 구간 중 약 90%가 눈으로 가득한 눈산행이었다. 평생 걸어 볼 눈길을 하루에 모두 걸은 느낌이다. 눈으로 가득한 임도를 걷고 또 걸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길과 하염없이 걸어야만 하는 내리막길은 저절로 우리를 수행자로 만들어준다. 다행스럽게 눈은 습설이 아니었다. 눈이 마치 설탕가루라 쌀가루처럼 느껴진다. 밟으면 발이 발목까지 빠지고, 빠진 발을 꺼내어 눈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백사장을 걸은 느낌이다. “라는 표현으로 이번 산행을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해 준 길벗도 있다.     

 

앞에서 러셀(russel)을 하며 에단호크님과 오공님이 길을 뚫고 다지며 나아간다. 러셀의 뜻을 찾아봤다. “제설차를 만든 미국 제조회사의 이름을 딴 등산 용어로 눈길 뚫기, 눈 헤쳐나가기, 제설작업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두 분이 앞서가며 길을 만들고 다진 덕분에 우리는 그나마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다. 앞서 간 본진은 먼저 내려가고 뒤에 쳐진 서너 명은 천천히 안전하게 걸으며 길을 무사하게 마칠 수 있었다.   

   

철새들이 서로를 보호하며 이동하고 날아간다고 한다. 어제 길을 돌아보며 철새들의 지혜가 떠오른다. “기러기떼가 ‘V’ 자형으로 날면, 전체 기러기 떼가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71%를 더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된다. 앞서 가는 기러기가 날개를 펴고 퍼덕일 때 뒤따라오는 기러기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앞선 기러기가 지치게 되면 그 기러기는 대열의 뒤로 빠지고 대신 다른 기러기가 앞으로 나가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된다. 대열의 뒤를 따르는 기러기들은 선두가 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기 위해 울음소리를 내게 된다. 기러기 한 마리가 아프거나 부상을 당하게 되면 다른 기러기들이 대열을 떠나 그 기러기를 보호하거나 호위한다.” (국가환경교육 통합플랫폼 인용)     

 

식사 자리에서 길을 뚫고 다져준 에단호크님과 오공님에게 우리 모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뒤를 따르는 기러기가 격려의 울음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우리가 함께 걸었기에 안전하게 이 길을 완보할 수 있었다. 혼자라며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길이었다. 길벗 한 명이 뒤쳐졌다. 등산화가 눈으로 얼어붙어서 걷기가 많이 불편한 상태다. 걷자님이 나섰다. 자신의 스패치를 벗은 후 발에 두르고 있었던 워머를 꺼내어 그 친구에게 신겨준다. 등산화 벗는 것을 버거워하는 그 길벗의 등산화도 벗겨주고, 이미 젖어있는 등산 양말도 벗겨주고, 발을 따뜻하게 감싸주며 자신의 워머를 신겨주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 등산화 끈도 다시 매어주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다만 그 광경을 감동과 미안함과 불편함과 조급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걷자님의 행동을 보며 감동을 받았다. 자신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불편한 사람을 돕는 그 모습이 주는 감동이다. 선뜻 나서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미안함도 있었다. 뒤에 쳐진 그 사람에 대한 불편한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어둡기 전에 하산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있었다. 많은 감정이 뒤섞여있었다. 본진은 이미 한참 앞서 가고 있었고, 점심 식사를 위해 햇볕이 드는 곳에 모여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길벗은 발이 조금 따뜻하고 편안해졌는지, 식사 장소에 도착한 후 아무 일도 없듯이 매트를 깔고 웃으며 즐겁게 식사하고 얘기하는 모습을 보며 내심 조금 안심이 되었다.    

  

리더로서 가장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바로 ‘사고’다. 함께 걷는 일행 중에 누군가가 사고로 인해 걷지 못하게 된다거나 어둠이 짙게 깔린 낯선 산속을 헤매게 되는 경우다. 물론 랜턴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모든 참석자가 준비해 왔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특히 겨울 산행에서는 날이 밝을 때 하산을 해야만 한다. 리더는 그런 시간을 모두 염두에 두고 코스를 결정하고 속도를 조절하며 걷는다. 그런 이유에서 늦게 따라오며 걷는 길벗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다. 끝날 즈음 나를 포함해서 네 명이 천천히 걸으며 뒤에 오는 길벗을 챙겼다. 중간에 “날이 어두워질 수 있으니 조금 빨리 걸으세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범일님의 한 마디.  “이미 최선을 다해 걷고 있어요.” 더 이상 서두르라고 얘기하지 말라는 따끔한 정문일침이었다. 그 이후로 뒤에서 따라오는 길벗을 확인하며 묵묵히 걸었다.      

 

걷자님과 범일님의 행동과 말을 들으며 자신을 많이 반성했다. 그들은 행동으로 또 말로 응원하며 기다리고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나는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함을 느꼈다. 걷자님의 행동이 큰 가르침을 주었고, 범일님의 말 한마디가 또 한 번 가르침을 주었다. 그 말을 들은 후 불편한 마음을 내려놓았다. 마음을 바꿔 먹으니 불편함은 금방 사라진다. 덕분에 남은 구간을 웃으며 즐겁게 걸을 수 있었다. 그 길벗에 대한 마음도 불편함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힘들다고 불평하지도 않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차 안에서 그 길벗의 얘기를 들으며 또 한 번 반성했다. “안내 산악회를 따라가 걸을 때 점심 식사를 거르고 걸으면 도착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빨리 도착하게 된다.” 식사를 거르며 걸었다는 말을 들으며 또 한 번 미안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걷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닌 친구에게 모질게 대했던 나 자신이 참 못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피하고 미안했다. 이제 그 친구에 대한 불편함과 미운 마음은 모두 사라졌다. 앞으로는 그 친구가 불편하지 않게 잘 챙기며 함께 걸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길, 길벗, 마주치는 상황은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비난과 불평의 화살을 외부나 타인에게 쏘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게 되면 자아성찰이 된다. 외부나 타인을 향한 마음은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마음은 상대방에게도 전달되어 양자 모두 불편한 상황이 된다. 나와 너 모두에게 득이 안 되는 상황이고 서로에 대한 미움, 불편함, 비난만 쌓인다. 하지만, 그 불편함의 빛을 자신에게 쏜다면 통찰이 찾아온다. 그 통찰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타인이나 외부로 향하는 마음 역시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한 반응에 불과하다. 문제가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한 일인데 답을 외부에서 찾고자 하는 어리석음이다. 마치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꼴이다. 내부나 외부로 향한 모든 마음은 자신의 내부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내부에서 시작한 일의 답은 자신의 내부에 있지, 결코 외부에서 찾을 수 없다. 어제 큰 가르침을 주신 걷자님과 범일님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불편한 마음을 갖고 대했던 작은미경님에게도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 즐겁게 함께 걸어요. 또한 이런 가르침의 기회를 준 어제의 길, 길을 함께 걸었던 길벗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감사합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