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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걷는 이유

걷고 2023. 3. 5. 12:24

자주 걸어 다녔던 상암동에 위치한 월드컵 공원, 하늘 공원, 노을 공원, 난지천 공원을 길동무들과 함께 오랜만에 걸었다. 그간 주말에는 경기 둘레길 진행하고, 평일에는 딸네 머물기 시작하면서 한 동안 이 길을 걷지 못했다. 길과 사람은 같은 점이 많다. 길과 사람은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늘 변한다. 세월의 흐름, 계절의 변화에 따라, 또 길과 사람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에 따라 달라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중요한 것이 있다. 길의 모습과 주변이 변해도 길은 늘 그 자리에 있다. 또한 사람이 변해도 그 사람은 그대로 그 사람이다. 길과 사람은 겉모습은 변해 보여도 길과 사람이라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길을 자주 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찾아가지 않게 되면서 멀어지듯, 사람들도 자주 만나다 만나지 않으면 멀어진다. 찾아가고 만나려는 노력은 자신에게 달려있다. 사람과 길이 변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변한 것이다.     

 

상암동 공원은 고향 같은 곳이다. 그래서 언제 어떤 상황, 날씨에 걸어도 편안하고 안심이 된다. 고향은 지친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의 휴식을 제공해 주고 회복할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하는 곳이다. 그래서 나이 들면 사람들은 고향을 찾는 것 같다. 반면 경기 둘레길은 바깥세상이다. 바깥세상은 두렵고 긴장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두려움과 긴장감은 사람을 단련시킨다. 웬만한 풍파에 흔들이지 않는 뿌리의 근력을 키워준다. 비록 나뭇잎 몇 개 떨어지고 가지가 부러져도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바깥세상에서 힘든 풍파를 견딘 후에 심신의 안정과 휴식을 찾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향은 휴양소이고 바깥세상은 전쟁터이다. 전쟁이 두렵다고 바깥세상에 나가는 것을 꺼리고 고향에만 머물러 있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고향은 내부의 힘을 키우는 장소이고, 바깥세상은 그 키운 힘을 기반으로 전쟁을 치르는 장소이다.    

  

안과 밖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단련이 될 수도 있고, 약해질 수도 있다. 안에만 머물면 안락함은 있지만, 발전과 변화가 없다. 밖에만 머물면 강해질 수는 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안과 밖을 넘나들며 균형 있는 발전과 성장을 이루는 것도 삶의 지혜다. 그런 면에서 상암동 공원은 ‘안’이고 경기 둘레길은 ‘밖’이다. ‘안’에서 체력을 키워 ‘밖’을 걷고 있다. ‘밖’에서 단련된 체력을 활용해서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며 성장한다. ‘밖’에서 겪었던 많은 일들이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 다시 ‘안’으로 들어와 상처를 치료한 후 다시 ‘밖’으로 나가 전쟁을 치른다. 경기 둘레길을 걸으며 참석자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나 또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 변화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고, 부정적인 부분도 있다. 이 두 가지가 합해져서 ‘나’를 만들어 간다. 따라서 나의 모습에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 모두 지니고 있다. 나의 긍정적인 부분만 인정하려는 습관도 서서히 변화하며 부정적인 부분을 받아들이게 된다. 상처가 있는 나무가 아무 상처도 없는 매끈한 나무보다 더 매력 있어 보이는 이유다.      

 

경기 둘레길을 걸으며 도전을 하고 있다. 길에 대한 도전, 자신에 대한 도전,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는 도전, 날씨에 대한 도전, 시작과 마무리를 하는 것에 대한 도전 등을 하고 있다. 도전을 하면서 용기와 자신감도 얻지만, 가끔은 부정적인 상황을 맞이하고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길을 걸으며 이 두 가지가 모두 내 안에 머물며 화학작용을 일으켜 ‘나’가 되어간다. 긍정과 부정이 섞이면서 두 가지를 모두 수용하는 지혜를 얻는다. 그만큼 성장한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지만 지금처럼 걸으면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성취감이 생기고 그 성취감은 자기 효능감을 갖게 된다. 어떤 일이든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다. ‘실패는 없고 다만 포기만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가정은 ‘안’이고, 사회는 ‘밖’이다. 가정과 가족이 버팀목이 되고 희망이 되어 사회생활을 한다. ‘밖’에서 받은 상처를 ‘안’에서 치료하고, 때로는 ‘안’에서 받은 상처를 ‘밖’에서 치료받기도 한다. 안팎의 경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허무는 것도 중요하다. 가정과 자신을 위해 쌓아놓은 ’ 안‘의 울타리가 때로는 ’ 밖‘의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 안팎의 경계가 분명해 보여도 실은 자신의 의식이 만들어 낸 허상일 수도 있다. 과연 가정은 ’ 안‘이고 사회는 ’ 밖‘인가? 자신의 꿈을 ’ 밖‘에서 실현시키는 사람에게 ’ 밖‘은 ’ 안‘이 될 수도 있다. 정체성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자신을 위한 경계를 만들 필요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그 경계를 허물어야만 한다. 허문만큼 자신의 세계가 확장된다. 자기 안에만 머무는 사람이 보는 시야는 자신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길을 걷는 것도 밖의 세상을 경험하며 자신의 세상을 넓히는 작업이다. 길과 자연,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의 벽을 허물게 된다. 때로는 자신 속으로 더욱 움츠려 들기도 한다. 움츠려드는 자신을 안고 달래며 걸으면 저절로 어깨가 펴지고 허리도 곧게 서 된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불편함을 안고 가야 할 길을 가고,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고, 하기 싫은 일을 하기도 한다. 불편함, 사람에 대한 감정, 삶의 짐에 대한 부담감은 그 자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자신의 생각과 의식이 만들어 낸 허상이다. 우리는 그 허상에 속아 다시 큰 불편함을 만들어 내며 그 안에서 힘들게 살아간다. 이런 삶의 무게를 버티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걷기다. 이 모든 것을 안고 걸으면 된다. 처음에는 발걸음도 무겁고 힘들 수도 있지만, 불편함을 안고 견디는 힘이 생길수록 무게는 점점 더 줄어들어 가볍게 걸을 수 있다.    

  

오래오래 걷다 보면 심지어 생각조차 무거워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걷기를 마치면 저절로 행복한 미소가 얼굴에 가득 떠오른다. 우리가 삶의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는 순간이다. 무엇이든 갖고 있으면 무겁고, 흘려보내면 가볍다. 상황과 사람에 대한 불편함을 안고 살면 힘들고, 흘려보내면 편안해진다. 흘려보내려 해도 잘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그때는 무작정 걸으면 된다. 그 생각을 잊으려 애쓸 필요 없이 몸의 감각에 집중하며 걸으면 된다. 몸의 감각에 집중하는 순간 모든 고통은 사라진다. 다시 고민이 떠오르면 다시 몸의 감각으로 돌아오면 된다. 걸으며 발의 감각에 집중할 수도 있고, 들리는 소리에 집중할 수도 있고, 보이는 풍경에 집중할 수도 있다. 감각에 집중하는 순간 모든 생각들은 저절로 사라진다. 걷는 것은 안팎의 경계를 허물고 몸의 감각을 통해 삶의 고통을 행복으로 바꾸어주는 아주 쉽고 건강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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