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둘레길 58, 59, 60코스 후기> 상상과 실재(reality) 사이
경기 갯길 끝나는 날이다. 참석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세 코스를 하루에 걷기로 결정했다. 총 거리 26.8km로 8시간 45분에 걸쳐 걸었다. 걷기 전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를 보며 대충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58코스는 난이도 ‘하’로 2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59코스와 60 코스는 난이도 '중‘으로 각각 3시간 30분,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계산해 보니 총 소요 시간이 10시간 20분 정도. 과연 하루에 이 코스를 모두 걷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여러 사람의 블로그를 확인하며 고민이 깊어졌다. 하지만 공지를 올렸고, 같이 걷기로 결정을 했으니 일단 시작은 해야만 한다. 이 세 코스를 두 번에 나눠 걷는 것도 비효율적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우리 여섯 명은 이 세 코스를 점심 식사, 커피 마시는 시간과 휴식 시간 포함하여 총 8시간 45분에 완주했다.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잘 걸었고, 즐거운 대화로 발걸음은 더욱 가벼워졌고, 걷는 속도도 빨라졌으며, 걷는 내내 웃음과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함께 걸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함께 걸은 길동무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걷기 전에 이 길에 대한 상상을 한다. 자료를 검색하고 스스로 상상력을 더해 상상 속에서 걸어본다. 이 지점에서는 힘들 것이고, 이 지점은 아주 쉽게 걸을 수 있을 것이고, 이 지점에서 식당이 나오고, 이 지점에서 휴식을 취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한다. 막상 걷다보면 상상은 그저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 상상은 상상에 그치고 실재와는 다르게 나타난다. 오르막만 보면 기겁을 하며 걷기 싫다고 얘기하는 길동무가 있다. 하지만 너무 가볍게 걷는 모습을 보며 엄살을 떨고 있다는 것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그 친구에게 오르막은 상상의 오르막으로 높고 걷기 힘든 코스이다. 막상 걷다보면 상상 속 오르막과 실재 마주치는 오르막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상상은 더 큰 상상을 만들어 내며 악마의 속삭임으로 유혹한다. ‘오르막은 힘들 거야, 굳이 이 길을 걸어야만 하니? 쉬운 길도 있고, 다른 길로 가도 되고, 아니면 그만 걷고 맛있는 거 먹고 집에 가서 쉬어. 이미 충분히 걸을 만큼 걸었잖아?’ 마음 속 악마의 속삭임은 멈출 줄 모르고 걷기 의지를 꺾으려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악마의 속삭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무시하고 걷는 것이다.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며 몸의 감각에 집중하거나, 자연의 소리 즉, 바람소리, 낙엽 밟는 소리, 딱따구리가 나무를 뚫고 있는 소리, 또는 농촌의 향기인 축사 냄새를 맡으며 걸으면 된다. 감각이나 소리, 냄새에 집중하는 순간 악마의 속삭임은 저절로 물러간다. 그리고 악마가 사라진 자리에 길동무들의 밝은 목소리와 활기를 느끼며 즐거운 대화를 하다보면 저절로 이미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상상의 악마에게 굴복하느냐, 아니면 악마는 스스로 만들어 낸 상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실재인 자연의 소리나 몸의 감각에 집중하느냐의 선택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즐겁게 걷느냐 아니면 힘들게 걷느냐 역시 자신의 상상 속 악마와의 싸움에서 지느냐, 아니면 이기느냐에 달려있다. 즐거움과 힘듦 역시 상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몸은 힘들 수도 있다.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숨이 차올라 힘들 수도 있고, 다리가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는 듯 한발 한발 옮기기가 힘들 때도 있다. 몸은 힘들 수 있지만, 그 힘듦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생각은 즐거울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몸이 힘든 것은 실재다. 하지만 그 실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즐거울 수도 있고 괴로울 수도 있다. 몸의 힘듦은 실재이고, 받아들이는 마음과 생각은 상상 속 세상이다.
길을 걸으며 많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난다. 꾸준히 나오는 사람도 있고, 새로 참석하는 사람도 있다. 한 사람이 모임에 동참하면서 전체 모임의 역동이 변화된다. 어떤 사람의 참석은 분위기를 밝게 만들고 활기차게 만들기도 한다. 반면 어떤 사람의 출현은 분위기를 냉각시키고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상황을 ‘상상과 실재’라는 이론을 대입해서 한번 생각해 볼 가치도 있다. 기분 좋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사람의 모습이 평생 즐겁거나 행복하거나 밝지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일단 우리 머릿속에 그 사람을 만나면 즐겁다는 주관적인 판단이 그 사람은 매우 유쾌한 사람이라는 상상을 하게 만들고, 그 상상이 마치 실재인 것으로 착각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사람과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지면, 이제 그 사람은 상상 속 기분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사람은 그냥 그 사람일 뿐이다. 헌데 우리는 사람을 스스로 판단하고, 재단하고, 평가하며 상상 속 인물로 만들어 버린다.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좋은 사람도 없고, 완벽하게 나쁜 사람도 없다. 인간은 다양한 모습을 지닌 입체적 인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다양한 모습 중 극히 일부분만 보며 이렇다 저렇다고 판단하며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고 코끼리 모습을 상상하는 것과 같다. 과연 우리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매우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자신의 주관에 의지한 판단이고, 그 반대의 감정 역시 자신의 주관에 의한 판단에 불과하다. 흔히 ‘주관을 모두 버리고 아주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면..’ 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 말 자체는 이미 모순을 품고 있다.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판단하는 주관이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생존을 위해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판단하는 모든 상황, 사람, 환경 등은 이기적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객관적인 판단은 이미 무의미하다. 그 판단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지극히 주관적인 객관이기 때문이다.
길을 걸으며 길 위에서 많은 상황을 맞이한다. 사람도 만나고, 다양한 길도 만나고, 다양한 날씨도 만난다. 그리고 걸으며 사람, 길, 날씨에 관한 주관적인 판단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며 걷는다. 이렇게 하면 모든 주어진 상황과 만나는 사람에 관한 차별심을 내려놓을 수 있고, 차별심이 떨어져나간 순간 마음 속 평화가 찾아온다. 우리가 걷는 이유는 심신의 건강을 위해, 또는 힘든 일상 속 일탈을 통한 치유를 위해, 또는 복잡한 머리를 비우기 위해, 등등 각자 이유가 있다. 걸으며 오직 걷기에만 집중한다면, 또는 길동무들과 즐거운 대화만 이어갈 수 있다면, 또는 혼자 조용히 묵묵히 걸을 수 있다면 상상 속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괴로움과 즐거움 역시 우리가 만들어 낸 상상이고 허상에 불과하다. 이제 경기 둘레길은 20개 코스로 연결된 ‘경기 숲길’만 남아있다. 아직도 4, 5 개월 이상 걸어야만 완주할 수 있다. ‘경기 갯길’을 마무리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경기 숲길’을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 아끼고 존중하며 판단과 평가를 내려놓고 즐겁게 걷기에만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경기 둘레길 완주한 후 서로 얼싸안고 춤 출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동안 함께 걸었던 모든 길동무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