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일기

<경기 둘레길 10코스 후기> 아, 평화로워요!

걷고 2022. 8. 28. 00:19

 “아! 지금 너무 평화로워요!” 스위치님이 경기 둘레길 10코스의 종료 지점인 군남 홍수 조절 댐 근처에 와서 쏟아낸 탄성이다. 그 소리를 들은 꽃가루님이 “맞아, 바로 그거야!”라고 맞장구를 치고,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나는 속으로 춤을 춘다. 그리고 “걷기 세계의 입성을 축하합니다.”라고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렸다. 우리가 걷는 이유 중 한 가지를 두 분이 말로 정확하게 표현해 주셨다. 걸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틱낫한 스님은 “한 호흡에 미소, 한 호흡에 평화”를 말씀하셨고, 직접 호흡 명상을 지도하시며 당신 스스로 늘 미소를 짓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지내셨다. 가끔 그 스님의 말씀을 흉내 내어 ‘한 걸음에 미소, 한 걸음에 평화’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한 걸음 걷고 미소 짓고, 또 한 걸음 걷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어서이다. 오늘 두 분의 말씀을 통해서 걷는 이유 한 가지를 찾았다. 마음의 평화.    

 

한 걸음 내딛는다는 것은 대단한 기적이다. 중력을 거스르는 행동을 통해서 한 걸음 옮길 수 있다. 중력은 우리를 대지로 끌어당긴다. 그 끌어당기는 힘에 역행해서 다리를 들어 올리고 앞으로 나아가 땅에 내딛는다. 그리고 다른 다리를 다시 들고 옮겨서 땅으로 내딛으며 앞으로 전진한다. 누구나 걸을 수 있다고, 또 걷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한 걸음을 걷기 위해서 걷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 의지에 따라 뇌는 걷기를 명령한다.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을 해야만 걸을 수 있다. 그리고 뇌의 지시에 따라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몸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을 해야만 한다. 그 기능은 중력을 거스르는 대단한 행동이다. 따라서 걷는다는 것은 기적일 수밖에 없고, 기적이라고 불려야만 한다. 또한 걷는 것은 축복이다. 몸이 불편해서 걷지 못하는 분들도 있고, 뇌의 손상으로 걷지 못하는 분들도 있고, 늙거나 병들어 걷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은 ‘걷기’는 대단한 일이며 동시에 엄청난 축복이다. 우리는 그 축복과 기적을 잊고 살아간다.      

 

오늘처럼 길동무가 길을 걸으며 마음이 평화롭다고 얘기를 하는 순간 우리는 축복과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걷기 덕분에 평화롭다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이고 축복이다. 우리 모두 ‘걷기 중독’에 빠졌다. 일반적으로 중독에는 두 가지 증상이 있다. 금단 증상과 내성이다. 금단 증상은 중독에 빠진 물질을 더 이상 취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몸과 정신의 이상 반응이다. 내성은 중독된 물질의 강도를 높여야만 이전의 만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더 강한 강도나 자극을 필요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알코올 중독이나 도박 중독, 약물 중독 등 모든 중독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이다. 이런 중독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하지만 ‘걷기 중독’은 건강한 중독이다. 걷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금단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더 강도 높은 걷기를 계속해야만 마음이 충족되지도 않는다. 언제든 걷지 않아도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고, 강도가 낮은 걷기를 한다고 해서 마음의 충족감이 줄어들지도 않는다. ‘걷기 중독’의 유일한 증상은 바로 ‘걷고 싶은 마음’ 뿐이다.    

  

이 걷고 싶은 마음이 경기 둘레길을 걷게 만들었다. 걷기에 중독된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왜 하필 경기 둘레길일까? 수많은 길 중에 왜 우리는 이 길을 선택했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늘 걸으며 길이 우리를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걸으며 사람들을 만나고 자연을 만난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길을 선택해서 걷고, 길은 수동적인 존재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그 생각이 깨졌다. 우리가 길을 걷는다는 생각은 무척 건방진 생각이다. 길이 우리를 불렀고, 길이 우리에게 그 길을 걷는 것을 허락했고, 그 덕분에 우리는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길이 우리에게 자신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라고 축복을 내려준 것이다. 우리와 길은 오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합일이 되었다. 길을 걷는 주체가 우리고, 길은 우리가 걷는 대상이 아니고, 주체와 대상이 사라진 ‘하나의 존재’가 된 것이다. 주객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는 순간 투쟁이 시작된다. ‘너’와 ‘나’가 분리되는 순간 불화가 시작된다. ‘너의 것’과 ‘나의 것’이라는 분리된 소유 개념이 생기는 순간 욕심이 시작된다. 그리고 각자의 성을 높고 두껍게 쌓으며 자신을 지킨다는 어리석은 착각 속에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의 성에 누가 침범해서 빼앗아가지나 않을까라는 걱정과 불안으로 평생 살다가 삶을 마치게 된다. 이들에게 마음의 평화는 남의 나라 얘기에 불과하다. 슬픈 얘기다. 그들이 단 한순간만이라도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 방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걷기’를 제안하고 싶다. 오늘 길동무들이 힘든 길을 걷고, 끝나가는 지친 시간에 스스로 ‘평화롭다!’라고 외쳤다. 그 외침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진심의 표현이다. 이 소리를 들은 길은 우리에게 미소 지으며 다음 길을 평화롭게 열어줄 것이다.      

 

미세 먼지 하나도 없는 자연을 바라보며 걸었다. 산과 하늘의 경계선이 너무 뚜렷하다. 누가 금을 그어놓은 것 같다. 파란 하늘에는 흰 구름이 무심하게 떠있다. 시원한 바람은 계절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고, 임진강의 물결은 잔잔히 흐르며 지난 홍수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있다. 아름다운 산길도 걸었고, 임진강을 바라보며 따라 걷는 흙길도 걸었다. 다리를 건너며 다리 너머에 보이는 군남 댐도 보았고, 시골 마을의 맛 집에 들어가 맛있는 식사도 했다. 도로를 따라 걸었고, 다시 산길을 걸으며 길이 끝나가는 아쉬움을 느끼며 걸었다. 경기 둘레길을 단 1m도 빠지지 않고 걷겠다는 마음으로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걸었다. 고지식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런 고지식한 모습이 오히려 아름답다. 사랑하는 길을 단 한 걸음이라도 빼고 걷는다는 것은 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길은 우리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받아주었는데, 우리가 그 길은 단 1m라도 빼고 걷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경기 둘레길을 끝날 때까지 이렇게 걸을 것이다. 그것이 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우리를 받아준 길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물론 혼자 걷는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 결코 혼자 걷는 것이 아니다. 식사를 혼자 해 먹을 수도 없고, 숙소를 혼자 만들어 묵을 수도 없다. 혼자 음식을 해 먹는다고 해도 누군가가 식재료를 만들어야만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이 세상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달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차량을 예약하고, 누군가는 차도를 건널 때 수신호로 차량을 통제하고, 누군가는 간식을 준비해서 나눠주고, 누군가는 길에 대한 자세한 안내도를 준비해서 공유하고, 누군가는 길의 방향을 잡아주기도 한다. 결국 ‘나’는 ‘우리’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함께 걷는 길동무들에게 무한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덕분에 행복하게 걸었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깃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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