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타이거
사람이 대물림되는 상황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위치와 지위가 태어나면서 결정이 되는 환경에 처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코끼리를 나무에 묶어놓고 오랜 기간이 키우면 묶어놓은 끈을 풀어주어도 끈 길이의 반경 밖으로는 나가지 못한다고 한다. 이미 자신의 한계를 설정해 놓고, 그 안에서 지내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정해 놓고, 한계를 벗어나려는 노력조차 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삶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 운명을 거역하는 순간 자신과 가족, 자식과 아내, 부모에게까지 미치는 영향을 모른 체하며 굴레를 벗어던지는 삶을 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델리 구시가지로 가보십시오. (,,,,,,,,,,,,,) 시장에서 닭들이 어떻게 보관되는지 구경해보세요. 철사로 두른 닭장 안에 빽빽하게 들어있는데, 서로 쪼아대기도 하고 똥을 싸지르기도 하며 그저 숨 쉴 틈이 없어 아우성이랍니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악취, 공포에 찌들고 털이 달린 살덩어리들의 악취지요. 이 닭장 바로 위 나무 탁자에는 어린 푸주꾼이 앉아서, 이제 막 칼로 배를 가른 닭의 살점이나 내장들을 자랑하듯 과시합니다. (............) 닭장 안이 수탉들은 위에서 떨어지는 피 냄새를 맡고 형제들의 내장이 주위에 휘날리는 것을 봅니다. 다음엔 자기가 똑같은 신세가 되리라는 걸 알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거하지 않습니다. 닭장에서 나오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이와 똑같은 일이 인간들에게도 행해지고 있습니다.” (소설 ‘화이트 타이거’ 본문 중에서)
소설 타이거의 주인공인 발람은 인력거꾼의 아들로 태어나 천신만고 끝에 정부 관리들과 결탁하며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고 살아가는 지주의 운전수가 된다. 이들의 삶과 하층민의 삶은 하늘과 땅만큼 그 거리가 크다. 단순히 크다는 것으로는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절대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될 수 없듯이, 하층민의 삶은 절대로 지주의 삶이 될 수가 없다.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라는 운명의 족쇄를 차고 살아간다. 지주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환경에서 벗어나지도 않고 벗어날 수도 없듯이, 하층민의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 발람은 지주의 운전수로 생활하며 지주와 정부 관료들과의 부정한 거래도 목격하고 지주 역시 어떤 상황에서는 ‘을’이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영원한 ‘갑’도 없고, 영원한 ‘을’도 없다. 자신의 위치와 환경에 따라 ‘갑’과 ‘을’이 뒤바뀐다.
발람은 삶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족들조차 버리고 홀로서기를 한다. 지주들은 가족들을 담보로 운전기사를 고용하기에 만약에 기사가 잘못을 저지르면 가족들에게 앙갚음을 한다. 기사는 자신의 닭장에서 벗어나 외지에 나가 기사 노릇을 하며 돈을 벌고 그 돈 중 일부를 가족들에게 보낸다. 닭장을 벗어나도 여전히 더 큰 닭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대가족 제도에서는 가족과 친척들도 족쇄가 된다. 자식을 담보로 맡기며 가족들은 생계를 유지하고, 지주들은 가족을 담보로 기사를 부린다. 이런 상항에서 닭장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가족조차 포기하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닭장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포기하고, 외부로 뛰쳐나가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비인간적이지만,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고뇌를 써 내려간 소설이다.
우리나라에도 과거에는 양반과 상놈이 있었다. 양반은 주인이 되고, 상놈은 종이 된다. 주종관계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바뀌지 않는다. 주체의식이 있는 종은 그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다 심한 좌절을 겪으며 결국 환경 내에서 살다가 삶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양반은 종을 종 이상으로 대우해주지 않고 충실한 종의 노릇을 하는 대가를 지불하며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비록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현실에서도 엄연히 남아있다. 회사의 대표 또는 주주와 종업원의 관계가 그럴 것이고, 계약 상 ‘갑’과 ‘을’의 관계가 그럴 것이고, 어떤 조직 내에서도 엄연한 주종관계가 존재한다. 다만 예전의 주종관계를 조금 더 세련되게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주종 관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각자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판단하고 평가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처한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주체적인 삶이란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하고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한 외견상 좋은 환경에 살고 있더라도 그들의 삶은 결코 주체적일 수가 없다. 주인의 삶을 포기하고 돈과 명예, 권력 등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돈, 명예, 권력 등을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종이 주인이 되고 정작 주인은 종을 충족시키기 위한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 주인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망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태어났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할 때 가슴이 뛰고 설레는지, 무슨 일을 할 때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몰입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질문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멈추지 말아야 한다. ‘가난한 주인’과 ‘배부른 종’ 중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또는 살고 있는지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반드시 가난한 삶이라는 것도 아니고, 종으로 산다고 반드시 배부르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일찍 찾을수록 풍요로운 주인의 삶을 누릴 수가 있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풍요와 빈곤의 기준이 성립된다. 최근에 채용 면접관으로 다녀온 적이 있다. 면접 응시생들의 답변을 들으며 답답하고 안타깝게 느꼈던 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직업이 필요할 뿐이다. 삶의 가치나 꿈을 추구하거나 고민한 답변을 못 들었다. 물론 현실이 얼마나 척박하고 그들에게 직업이 얼마나 간절한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나 역시 그런 삶을 살아왔기에 그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더 안타까웠다.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을 통해서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나의 가치와 남의 가치를 비교할 필요가 없이 자신만의 가치를 기준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 가치는 살아가면서 변하기도 할 것이다. 변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그 변화는 나선형 상승 곡선을 그리며 삶의 질을 개선시키고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과 풍요로움을 더해준다. 태어난 이유와 삶의 가치에 대한 질문은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그 뿌리가 모든 존재로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다. 나와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서 삶의 큰 방향이 바뀌게 된다.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우리를 위한 삶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자신의 삶의 가치는 결국 우리의 가치와 연결된다.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너’와 ‘나’의 구분이 없어지면 분별심이 그치게 되고, 분별심이 사라지면 내면의 모든 투쟁이 멈추고 평화가 찾아온다. 신심명(信心銘)에 나온 첫 구절인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네, 오직 분별을 멈추면 되네 ‘라는 말씀과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