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ego)와 자신(Self) - 병원에서 생긴 일
병원에 아침 일찍 도착해서 진료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 세 분이 오셔서 진료를 받고 주사를 맞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병원 의사가 친절하다는 소문을 듣고 이 병원을 찾아왔다고 하며 기분 좋은 수다를 떨고 계셨다. 정확히 무슨 주사를 맞는지는 몰라도 5만 원짜리와 10만 원짜리가 있는데, 병원에서는 5만 원짜리를 맞으라고 하고, 할머니들은 10만 원짜리를 맞으시겠다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일반적인 상황과는 반대되는 상황이다. 얘기를 들어 보니 간호사들이 5만 원짜리 주사약을 미리 따 놓아서 그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했고, 할머니들은 그 주사는 효과가 떨어지니 10만 원짜리를 맞겠다고 한다. 사전에 10만 원짜리 예약을 하지 않았다고 간호사들은 우기고, 할머니들도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니 은근히 화가 올라온다. 간호사들이 사전에 확인 한 번만 했어도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자신들의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사전에 예약을 하지 않았다고 할머니들에게 잘못을 떠넘기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5만 원짜리 주사를 맞아야 되는 상황이다. 기분이 나빠졌다.
혈압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기분 좋은 소식을 듣고 진료실을 나와 접수창구로 가서 카드를 내밀었다. 진료비가 5,000원이 나왔다. 보통 3,000원 정도 나오는 진료비가 너무 많이 나와서 물어보니 직원들은 잘 모르겠고, 의사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직원들 대신 로봇을 앉혀놓은 것이 좋을 것 같다.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퉁명스러운 말투로 의사 선생을 만나겠다고 하며 카드 영수증을 기분 나쁘게 꾸겨서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의사는 9시 이전에 진료를 받아서 할증 요금이 산정되어 나온 것이고, 컴퓨터가 계산을 하기에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의사가 컴퓨터의 지시를 받고 있고, 환자에게는 정확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 할증료는 얼마나 되고, 진료 시간 기준인지, 아니면 접수 시간 기준인지 애매모호하다. 진료받고 나온 시간은 이미 9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더 논쟁을 하려다 포기하고 나왔다. 굳이 말로 싸워봤자 돌아올 답은 뻔하다. ‘컴퓨터에 나와 있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가 그 의사의 일관된 대답일 것이다. 기분이 상해서 병원을 나오며 병원을 바꿔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빌딩 2층에 있었던 병원은 최근에 3층으로 확장을 하면서 이전했다. 병원 바로 옆에 젊은 사람이 약국을 차렸다. 2층에 있던 약국은 졸지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아마 의사가 아들에게 약국을 차려준 것이 아닐까라는 상상도 해 본다. 10년 이상 바로 옆에서 장사를 해 오던 2층 약국은 매우 서운했을 것이다. 화가 나서 3층 약국에서 약을 사지 않고 일부러 2층에 내려가서 약을 구입하며 “타격이 크시죠?”라고 위로의 말을 걸었다. 한숨 소리만 들린다. 갑자기 의사가 더 미워졌고 의리도 모르고 돈만 벌려는 파렴치한이라는 생각에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병원을 바꿔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괜한 짜증이 올라온다. 짜증이 난 이유를 살펴보았다. 평상 시라면 5,000원의 진료비로 인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인은 마음속에 남아있는 어떤 사람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었다. 어젯밤에 가까운 지인에게 연락을 두 번이나 했는데도 연락이 없어서 그 사람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아들 같은 젊은 친구였기에 마음 한 구석에는 괘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불편함이 남아 있다가, 할머니들을 대하는 젊은 간호사들이 태도를 보고 화가 발화되었고, 발화된 분노는 간호사와 의사에게 표현되었다. 그 결과 아무 상관도 없는 약국을 미워하기도 했다. 화를 냈던 과정을 살펴보니 그간 마음공부를 해온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인다. 전화했던 내용은 굳이 답변을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일이다. 두 번씩이나 전화를 할 필요도 없는 일인데, 예전의 습관이 남아있어서 두 번이나 전화를 하고 혼자 씩씩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간호사가 아닌 누구였어도 어떤 식으로든 불편한 마음은 표현되었을 것이다. 컴퓨터에 기록된 자료에 의해 진료비가 정산되니 굳이 의사의 잘못도 아니다. 접수창구 직원에게 불쾌한 언행을 한 것이 무척 부끄러웠다. 의사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다. 상황을 전혀 모르면서도 약국 젊은 약사에게 부정적인 마음을 갖게 된 것도 매우 창피하다.
그 일로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했고, 그 불편한 마음은 몸의 반응으로 나타났다. 화를 내면 온몸이 마치 매를 맞은 것처럼 쑤신다. 목 뒤에서 허리까지 등 전체가 경직되고 쑤시고 아프다. 얼굴에는 열기가 느껴지고 머리는 뜨겁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올라오려고 하고, 어떤 말에도 기분 좋고 편안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홀로 걷는 일이다. 또는 말을 자제하고 올라오는 짜증이나 불편함을 판단하지 않고 알아차리며 머무는 것이다. 다행스럽게 손주들과 놀면서 불편한 마음은 웃음으로 변하고 주름진 마음도 펴지게 되었다. 풀어진 마음으로 어제의 일을 복기하니 창피할 따름이다. 요즘 마음공부를 게을리해서 발생한 일이다. 매일 하던 마음공부를 하루라도 하지 않게 되면 마음 정원에 잡초가 가득 올라온다. 그 잡초는 매일 뽑아도 다시 올라온다. 뽑고 앞으로 한 걸음 전진하면 뒤에서 다시 올라온다. 스님들이 절 마당을 깨끗이 빗질하고, 잡초를 뽑는 것은 단순한 청소가 아니고 마음 밭의 잡초를 뽑는 중요한 일이다. 잡초를 뽑으며 무명초(無明草)를 뽑아내는 수행이다. 지혜의 빛이 가려진 어둠인 무명의 풀을 뽑아내는 수행이다.
한 친구가 아침에 좋은 글을 보내왔다. 마치 어제 나의 상황을 미리 알고 있듯이. “마음공부를 하다 보면 중간중간, 기독교 식으로 말하자면 ‘시험에 들게 하는’ 일들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동안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어렵게 조금씩 진전이 있다 싶던 마음공부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속된 말로 도로아미타불 된 건가 싶은 깊은 실망감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원래 마음이라는 것은 허공과 같아서, 진전이 있을 것도, 퇴보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중략)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 마음도 내 마음이고, 그 마음을 마음대로 해보려 하는 그 마음도 내 마음이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그런 아리송한 마음도 내 마음이니,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고,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된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내 마음을 내가 모른다고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내 마음은 언제나 거기 그대로 나의 세상을 꽉 채우고 있으니, 그저 담담하고 꿋꿋하게 그것이 내 마음이라는 것만 잊어버리지 않고 있으면 된다.”
‘에고(ego)’와 ‘자신(Self)’와의 싸움에서 어제 TKO패를 당했다. ‘에고’는 ‘나’라고 생각하는 ‘식(識)’이 만들어 낸 허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허상을 ‘나’라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어제의 일은 ‘에고’가 장난질 친 것에 불과한데, 그 ‘에고’에 속고 놀아난 것이다. ‘자신’은 드넓은 바다이고 대지다. 바다 위에 또는 대지 위에서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바다는 또 대지는 그저 바다이고 대지일 뿐이다. 바다에 오물을 던져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캉스를 즐기고, 태풍이 몰아치고, 수많은 생물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이 모든 것들로 인해 바다가 변하지 않는다. 대지 역시 마찬가지다. 자연과 동물, 인간들이 서로 공존하거나 투쟁을 해도 대지는 그냥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다. 대형화재가 발생해도, 태풍이 몰아쳐도, 자연보호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도, 대지는 불평 한 마디 하거나 칭찬 한 마디 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받아들인다. 바다와 대지 위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들은 ‘에고’이고, 바다와 대지는 ‘자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