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일기

[수요 저녁 침묵 걷기 02] 나를 만나는 길 - 생존에서 실존으로

걷고 2022. 6. 2. 10:47

 틱낫한 스님의 모습과 플럼 빌리지의 일상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표현한 영화 ‘나를 만나는 길’을 길동무들과 함께 관람했다. 2013년 잠실 실내 체육관에서 스님의 법문을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80대 중반의 노구임에도 자세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으셨고 목소리는 카랑카랑하셨다. 영화에서 본 스님의 모습은 10년 전의 모습에 비하면 많이 부드러웠다. 스님의 뒤를 많은 사람들이 따라 걸으며 ‘걷기 명상’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사람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침묵 속에 발과 숲이 스치는 소리만 들린다. 가끔 들리는 새소리는 낙엽 밟는 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멋진 음악을 만들어 낸다. 자연이 만든 음악이고 침묵 속 걷기가 선물한 자연의 소리다.     

 

 영화 입장 시 포스터를 나눠준다. 한 사람은 그 포스터를 안방에 붙여놓았고, 그 포스터를 볼 때마다 종소리와 침묵 걷기를 떠올리고 싶다고 한다. 멋진 생각이다. 일상 속에서 숲을 거니는 여유로움을 유지하길 바란다. 플럼 빌리지에서는 15분마다 종이 울리고, 그 종소리를 듣는 순간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지금-여기에 머무는 시간을 갖는다. 스님께서는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이미 도착했고, 집에 있다. 하지만, 늘 무언가를 찾고 얻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닌다. 마음 챙김의 순간이 바로 지금-여기로 돌아오는 중요한 순간이다.” 종소리를 울리는 이유이다.      

 

 젊은 수행자가 집에 찾아가 부모님과 함께 어릴 때 썼던 자신의 인생 계획표를 보고 함께 웃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비리그에 입학하고, MBA를 마친 후, 연봉 30만 달러를 받고, 100만 불짜리 주택을 매입하고, 회사의 부사장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살다가, 70세에 깨달음을 얻는다.” 출가 전 초등학생 시절에 작성한 계획표를 보고 부모님과 함께 웃는다. 어머니는 ‘그런 일을 모두 이루면서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시간과 노력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웃으며 말씀하시고, 그는 ’이미 이루었다 ‘라고 얘기한다. 과정을 모두 이루지는 못했지만, 깨달음의 길에 들어섰으니 이미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늘 ‘생존’과 ‘실존’의 경계에서 갈등하고 선택하며 살아간다. ‘생존’은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삶이다. 먹고, 마시고, 자고, 자신의 생존 외의 다른 것은 관심을 갖지 않는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한 삶이다. 자신 외의 모든 존재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다른 존재들도 존중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존재들에게 감사함도 느끼지 못하며 생존 욕구에 충실한 동물 같은 삶이다. 반면 ‘실존’은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다. 왜 태어났고, 어떤 일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모든 존재들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간다. 살고 있는 공동체에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이유가 각자 다르다. 명예와 부를 위한 삶도 있고, 존재의 가치를 찾아 그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다. 전자의 삶은 ‘생존’의 삶이고, 후자의 삶은 ‘실존’의 삶이다. 대부분 ‘생존’을 위한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삶의 모습은 갑자기 찾아온 커다란 사건을 계기로 변하기도 한다.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사업의 부도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도 있고, 중요한 사람의 상실로 인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노환이나 병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삶의 중요한 계기와 변화는 ‘생존의 삶’은 ‘실존의 삶’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가족 전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일이 발생하면 지금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던 일들이 사소한 일이 된다. 큰일을 해결하는데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집중하게 됨으로써 다른 일들은 신경 쓸 겨를조차 없게 된다. 손자의 발달 지연으로 우리 가족은 순간적으로 멘붕이 왔고, 지금은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온 가족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며칠간 아이에게 집중하고 반응하니 아이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아이의 발달 지연이 정상화될 때까지 우리 가족은 최선의 노력을 할 것이고,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글쓰기와 걷기, 명상, 독서가 나의 일상이다. 하지만 지금 그 일상의 틀이 깨지기 시작했다. 일상의 틀의 변화는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틀을 변화시킨다. 글을 잘 쓰려는 생각도 사라졌다. 이곳저곳 좋은 트레킹 코스를 걷고자 하는 욕심도 사라졌다. 명상과 독서, 그리고 다른 잡다한 일들의 우선순위는 저절로 밀려났다. 아이의 정상적인 발달을 위한 모든 노력과 일상이 명상이고 독서이고 나의 삶이다. 삶 속에서 삶의 진리를 발견한다. 일상의 틀이 깨어지자 오히려 자유롭다는 생각도 들고, 그간 별반 중요하지도 않은 사소한 것에 너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했다는 생각이 들며 헛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흔히 얘기하는 ‘무엇이 중헌디’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구별하는 것이 지혜라는 말은 진리다.      

 

 지금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던 나의 일상은 결국 나의 욕심에 불과했다. 그간의 삶은 욕심을 채우기 위한 ‘생존의 삶’이었다. 아이의 상황은 욕심을 덜어내고 거두어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나의 삶을 ‘실존의 삶’으로 변화시켜주었다. 고맙다. 죽음 앞에서, 또는 인생의 큰 비극적이 상황 앞에서 ‘생존’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실존’은 의미를 되찾게 된다. 사람들은 큰 고통과 시련을 겪은 후에 변화된다고 한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본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향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고통과 시련은 쉽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한 하늘의 선물이다. 고통은 선물을 반드시 동반한다는 얘기는 진리다. 또한 고통은 깨달음의 과정이자 깨달음 그 자체이다.      

 

 틱낫한 스님께서 말씀하신 ‘이미 집이고 도착했다’라는 말씀의 뜻을 알게 되었다. 삶의 매 순간이 바로 ‘실존’의 순간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실존’의 순간에 머물지 못하고 ‘생존’의 방편을 찾아 늘 헤매고 떠돌아다닌다. 마음은 쉴 여유가 없고 몸은 분주하고 정신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원숭이 모습과 같다. 한 곳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바나나 하나 얻으면 떨어뜨리지 않으려 꽉 쥐고 또 다른 바나나를 얻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우리 몸과 마음이 잠시도 가만히 멈춰있거나 쉬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원숭이에 빗대기도 한다. 원숭이에서 산과 바위로 변하는 유일한 순간이 바로 지금-여기에 돌아와 머무는 마음챙김의 순간이다. 스즈키 순류 선사는 ‘잡념이 떠오르는 것이 명상이고, 잡념을 알아차리고 명상의 대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씀하셨다. 명상과 깨달음을 매우 단순하고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종소리는 ‘실존’으로 돌아오는 중요한 소리다. 삶의 고통은 ‘생존’에서 ‘실존’으로 변화하는 중요한 기회이다.     

 

 수요일 저녁에 침묵 걷기를 진행한다. 두 시간 정도 걷는 중간에 30분 정도 침묵 걷기를 하고, 마칠 즈음에 종소리 명상을 한다. 침묵은 모든 소리의 어머니이다. 모든 소리를 받아들이는 소리의 블랙홀이다. 침묵 앞에서 모든 소리는 저절로 사라진다. 소리가 ‘생존’이라면, 침묵은 ‘실존’이다. 종소리 명상은 지금-여기에 머무는 순간이다. 종소리는 마음챙김을 통해 산만한 마음을 거둬들이는 블랙홀이다. 침묵 걷기와 종소리 명상은 우리의 삶을 ‘생존’에서 ‘실존’으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시간이다. 길 안내를 하고 침묵 걷기와 종소리 명상을 진행하는 사람의 수준이 비록 미천하지만, 침묵과 종소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수요 저녁 침묵 걷기 시간만이라도 나 자신을 포함해서 참석하시는 모든 분들이 몸과 마음을 쉬고, 이미 도착했다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 되길 마음 모아 기도한다. 수요 저녁 침묵 걷기를 시작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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