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378] 행복한 책 읽기 10회기 (영화 ‘부활’)
날짜와 거리: 20220517 6km
코스: 일상 속 걷기
평균 속도: n/a
누적거리: 6,803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독서 치료 모임인 ‘행복한 책 읽기’ 마지막 회기다. 10주간 매주 진행하는 모임이다. 진행자도 수녀님이고, 참여자들도 모두 가톨릭 신자들이다. 오직 나만 불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비신자이다. 서로 대화를 나누며 가끔 공감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지만, 회기가 지나며 단어의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하며 이해를 넓혀나갈 수 있었다. 가톨릭과 불교, 그리고 모든 종교의 본질은 같다. 마음의 불편함을 덜어주어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마음속 평화를 찾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평화를 나눠줄 수 있다. 우리 모두 평화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매주 책을 읽고 와서 ‘마음 나눔지’에 나온 질문에 대한 답변을 돌아가며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의견을 나누기보다는 발표자의 의견을 듣고 ‘잘 들었습니다’라는 말로 발표자에게 감사와 격려를 전달한다. 집단 상담과는 다른 형식으로 진행되어 익숙한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수녀님께서 오랜 기간 진행 방식에 대한 고민과 수정 과정을 거쳐 지금의 방식으로 정착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시간은 영화 ‘부활’을 시청하고 나누는 시간이다. 지금까지 매번 참석했는데, 거동이 불편해서 마지막 수업을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안타깝고 아쉽다. 진행자인 수녀님께서 ‘마음 나눔지’를 보내주셨다. 혼자 마무리하자는 마음으로 출력해서 시험 문제를 풀 듯 고민하며 질문에 답을 쓰기 시작했다. 혼자서라도 마무리를 하고 싶고, 그 내용을 10주간 함께 공부했던 도반들과 나누고 싶다.
영화를 보며 마음에 남는 대사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계속 마음속에 진한 여운으로 남아있다. “예수님을 본 사람들도 예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는데, 하물며 보지도 않고 믿지도 못하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이 말씀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종교인이 지녀야 할 ‘믿음’의 중요성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언행이 삶에 도움이 되고 주변을 밝게 만드는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알고 있는 것과 실천하는 것과의 거리가 멀뿐이다. 믿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믿음의 중요성을 모두 듣고 알고는 있지만, 믿음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예수님의 현존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면 삶이 흔들릴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암흑 속 세상을 걸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애증의 감정도, 탐욕의 마음도, 쾌락의 유혹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지인들 중에 파티마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산티아고 포르투갈 루트의 갈림길에 있는 곳으로 파티마를 포함해서 산티아고 순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파티마는 가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모 발현지다. 그들이 파티마를 방문해서 성모를 볼 수 있다면, 또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들의 믿음은 더욱 굳어질 것이다. 종교의 출발은 믿음이 바탕이 다.
각자 생각하는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나와 너, 집, 자동차, 마음과 건강, 모든 물건들은 매 순간 변한다. 겉으로는 변하지 않고 늘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여도 실은 그렇지 않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난 만큼 변하고 있다. 변화는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일초 전의 ‘나’는 죽고, 지금의 ‘나’가 있다. 지금의 ‘나’는 이 글을 쓰는 순간 과거가 된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순간에 존재한다.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의 나’를 통해서이다. 전생을 알고 싶으면 지금의 모습을 보면 알게 된다. 미래의 모습을 보고 싶으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부활을 통해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삶의 책임은 오로지 자신에게 있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지금의 삶은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최종 결과물이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삶도 지금의 삶의 결과물이다. 부활을 통해서 누군가를 또는 어떤 상황을 탓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인생에서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꿈꾸는 세상은 무엇인가? ‘참 나’를 찾고 있다. ‘참 나’는 무엇인가? 어떤 물건인가? ‘나’라고 불리는 사람은 있는데 정작 ‘참 나’를 알지도 못하며 살아간다. 몸, 마음, 정신, 영혼 중 어느 것이 나의 ‘참 주인’일까? “몸, 마음과 늘 함께 있는 한 물건이 있다. 늘 함께 있는데도 찾으려면 찾을 수 없다. 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송담 큰스님께 받았다. 아직 소 발자국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소를 찾기 위한 여정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가끔 포기하기도 했고, 중간에 쉬어가기도 했고, 다시 찾아 나서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 과정의 반복이었다. 이제 포기는 하지 않는다. 비록 소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소를 찾기 위한 여정은 죽을 때까지 이어갈 것이다.
'꿈꾸는 세상'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진다. 살아오면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욕심을 내 본 적은 있어도, 이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는 꿈을 꾼 적은 없었다. 성취하고자 하는 것과 꿈꾸는 세상은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실은 매우 다른 세상이다. 성취는 개인적인 욕심이 바탕이 되고, 꿈은 우리라는 큰마음이 바탕이 된다. 사람의 크기는 생각하는 범위와 같다고 한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의 크기는 자신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가족만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회사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세상과 우주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나의 범위를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만큼 버거운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삶의 무게를 조금 덜어내고 보니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삶의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그 이후에 마음의 힘을 키워 같은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삶의 짐이 짐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들어줄 수 있다. 비로소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나갈 힘과 용기와 자신감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꿈이 현실로 변하는 중요한 순간이다.
인생에서 찾고 있는 것을 찾는 일이 부활의 과정이다.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부활이다. 부활의 출발은 믿음이다. 예수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과 심우도의 소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부활은 믿음을 되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