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374] 행복한 책 읽기 9회기 (아주 특별한 순간)

걷고 2022. 5. 12. 18:49

날짜와 거리: 20220512 9km

코스: 수원 화성 문화길

평균 속도: 4km/h

누적거리: 6.769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행복한 책 읽기’의 9회기는 안토니오 신부님의 ‘아주 특별한 순간’이라는 책을 읽고 나누는 시간이다. 안토니오 신부님의 피정 지도 내용을 글로 정리한 책이다. 갑자기 떠맡은 책임에 대한 불안감을 오직 성경에 의지하며 피정 지도를 하고 계신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고사를 해도 신부님께서 하느님의 뜻인지 결국 피정 지도를 하고 있다.

예전에 명상 지도를 하는 분에게 들었던 말이 기억난다. 명상 지도를 할 준비가 된 사람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 하고, 반면 지도하기에 부족한 사람은 가르칠 준비가 되었다고 한다. 정작 준비된 사람은 자신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어쩌면 자각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공부를 완벽하게 성취했으니 이제 남에게 지도할 자신이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이미 공부와는 거리가 먼 얘기다.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을 얻으신 이후에 바로 법문을 펼치지 못하셨다. 당신이 깨달은 다르마를 중생들에게 어떻게 펼쳐야 할지 고민을 하셨다. 깨달은 것과 가르치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다르듯이.

“콜카타의 마더 테레사가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위대한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다만 작은 일을 특별한 방법으로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본문 중에서)

이 글이 기억에 많이 남는 이유는 사소한 일에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고, 최선을 다해야만 하고, 할 일을 성공적으로 마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잘 생각해 보면 세상 일 중에 ‘사소한 일’은 없다. 비록 타인의 시선에는 사소하게 보는 일도 자신에게는 가장 소중한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하고 있는 일을 사소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 일이 다른 사람들 생각에 아무리 중요하게 느껴지더라고 그 일은 사소한 일이 되어 버린다. 결국 일 자체에 ‘사소함’과 ‘위대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두 가지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자기를 비하하고 자신의 일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없다. 반면 자기와 자신의 일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존중을 받기도 한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존중하게 되는 것이다.

신부는 천 원짜리 지폐를 예로 들어 우리 개개인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존중받을 존재인지 쉽게 설명하고 있다. 천 원짜리 지폐는 아무리 구겨지고 더러워도 물건을 살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정부가 인정한 화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폐의 주인이 액수가 큰돈만 돈이라고 생각하고 천 원짜리를 휴지라고 생각하고 쓰레기통에 버린다면, 그 돈은 가치를 읽어버리게 된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하고, 아무리 큰 죄를 저지르고, 나쁜 짓을 해도, 사람이라는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나, 저지른 죄나, 직업이나, 나이, 또는 성별로 사람들을 분류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불교에서는 ‘일체중생 실유불성 (一體衆生 悉有佛性)’이라고 하며 모든 존재 자체가 이미 부처가 될 종자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우리 모두 부처라는 의미다. 다만 그 부처가 아직 시절 인연을 만나지 못하고 과거의 업으로 인해 지금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부처의 씨앗이 발아되어 부처가 된다는 믿음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의미는 온 세상에서 자신만이 존귀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우리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기에 존귀한 존재라는 의미다. 따라서 모두 부처이기 때문에 ‘너와 나’의 분별은 의미 없는 일이다.

‘나를 위한 자성예언을 만들고 각자 돌아가며 발표하는 시간이다. 나의 자성 예연은 ’ 걷기, 글쓰기, 상담을 통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심신 치유를 도와주는 사람’이다. 먼 훗날 이 글을 다시 보게 된다면 자성 예언이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방법으로 준비해 온 것이 ‘걷고의 걷기 학교’와 ‘명독보감’이다. 걷기와 명상, 상담을 접목한 프로그램이 걷기 학교의 주된 프로그램 내용이다. 명독보감은 명상, 독서, 걷기, 집단상담, 글쓰기를 접목한 프로그램으로 지금 구상 중에 있다. 이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이 자성예언을 실현시키는 일이다. 그 일을 하는 방법은 바로 ‘작은 일을 특별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성공 여부와 규모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한두 명이라도 모이면 시작하면 되고 꾸준히 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우리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의존할 것인가? 세상의 의존할 것인가?” (본문 중에서) 이 질문을 불교식으로 정리해 보았다. “출세간 법에 따르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속세 법에 따르는 삶을 살 것인가?”로 표현될 수 있다. 출세간 법에 따르는 삶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삶이고, 속세 법에 따르는 삶은 자연의 이치에 역행하는 삶이다. 전자는 따르기 어렵고 익숙하지 않은 삶이지만, 후자는 따르기 쉽고 쉽게 익숙해지는 삶이다. 전자는 삶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지만, 후자는 삶을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어떤 법을 따르고 살아가는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지금의 삶을 보면 과거를 알 수 있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지금의 삶은 과거의 결과물임과 동시에 미래를 만들어나간다.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지만, 미래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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