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370] 피정(避靜)과 부처님 오신 날
피정은 가톨릭 성직자나 신자들이 일정 기간 한 곳에 머물며 수행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찰에서는 짧게는 3박 4일, 일주일, 또는 10일이나 한 달간의 집중 수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수행자들은 여름과 겨울에 각각 3개월 간 안거 기간을 정해 집중 수행을 하고 있다. 가톨릭의 피정은 불교의 집중수행이나 안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의 줄임말이라고도 한다. 시끄럽고 번잡한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기간이다. 피정은 병원과 같은 역할을 한다. 사회 속에서 다치거나 아프면 병원을 찾아가 치료를 받은 후에 다시 사회 속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전장에서 부상을 입은 병사는 야전 병원에서 완치를 한 후에 다시 전장 속으로 뛰어가야만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병원 속에서만 지내려는 사람들도 있다. 병원은 머무는 곳이 아니고 잠시 지나가는 곳이다. 휴식을 취하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건강을 회복한 후에 다시 사회로 나가기 위한 임시 정류장 같은 곳이다.
‘아주 특별한 만남’이라는 책을 읽었다. 인도 빈첸시오회 소속 안토니오 신분의 피정 지도 내용을 정리해서 엮은 책이다. 신부님의 피정 지도 과정과 경험, 자신의 어릴 적 가정환경, 그리고 신도들의 변화하는 내용을 실례로 들어가며 말씀하고 있다. 신부님께서 피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있다. “잘 먹고, 잘 쉬고,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사찰 집중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먹고, 자고, 쉬고, 명상하는 것이 집중 수행의 모든 것이다. 삶 역시 먹고, 자고, 휴식하고, 일 하는 것이다. 이 외의 다른 일은 없다. 굳이 한 가지 덧붙인다면 ‘생각하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생각 역시 잘 먹고, 잘 살고, 잘 놀기 위한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고, 일 하기 위해서 쉬고, 다시 일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이렇게 얘기하니 참 삶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별거 아닌 삶을 살아가기가 그렇게 힘들어 발버둥 치며 살아가고, 서로 싸우고 뺏고 뺏으며 살아가고, 울고불고 살아간다. 불쌍하다. 이번 기회에 잘 먹는 것, 잘 쉬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것의 의미를 하나씩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생각을 정리해 본다.
‘잘 먹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찰에 가면 사찰 음식을 먹는데, 그 음식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다. 고기나 생선이 없는 반찬인데 너무 맛있다. 다만, 음식을 남기면 안 되기에 자신의 그릇에 담은 음식은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 아무리 비싼 음식이나, 싼 음식도 배부르면 더 이상 먹을 수 없다. 위장은 비싼 음식이나 싼 음식을 차별하지 않는다. 혀 역시 차별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네 마음이, 허영심이, 욕심이 싼 음식과 비싼 음식을 차별할 따름이다. 음식의 가격보다 위생적으로 문제없는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된다.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고, 너무 적게 먹으면 배고프다.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 몸을 움직이면 배고파지고, 배고프면 어떤 음식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예전에 사찰에서 발우 공양을 할 때, 배고픈 상태에서 음식을 너무 많이 담아서 먹어치우기 위해 고생을 했던 적이 있다. 발우 공양은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것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몸을 열심히 움직이고 자신의 양보다 조금 적게 먹는 것이 몸에도 좋고, 음식에 대한 탐욕을 내려놓는 데에도 좋다. ‘잘 먹는 것’은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활동을 열심히 하며 위생 상 문제없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다.
‘잘 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찰에 며칠간 머물며 지낼 때 느낀 것이 하나 있다. 사찰 내에 있으면서도 하루 이틀은 바깥세상 일로 머릿속이 가득하다. 몸은 사찰에 와 있지만, 마음은 바깥 일로 시끄럽고 번잡스럽다. 사흘 정도 되면 바깥 걱정이 끊기면서 자연의 소리를 듣게 된다. 물소리, 바람소리, 낙엽이 뒹구는 소리, 새소리, 발자국 소리 등을 들을 수 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함께 머무는 소중한 경험을 한다. 이때는 마음이 편안하고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저절로 흐르기도 한다. 사찰 내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소를 보낼 수도 있고, 스님이나 신도 또는 일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이 저절로 올라온다. 마음의 평화가 주변 사람들과 환경에 그대로 반영이 되어 ‘나와 너’ 모두 평온한 삶을 살아간다. ‘잘 쉰다는 것’은 마음속의 번뇌를 벗어던지라는 의미다. 책에는 ‘뚜껑 닫힌 병’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뚜껑이 닫힌 상태에서는 어떤 새로운 물과 공기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뚜껑을 열어버리고 병 속의 모든 이물질들을 비워내야만 새롭고 신선한 환경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을 비워내는 일이야말로 피정과 집중수행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다. 비울 수 있어야만 제대로 쉴 수 있다. ‘잘 쉰다는 것’은 번민과 갈등으로 가득한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기도하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왜 이 말씀을 제일 마지막에 하셨을까? 기도는 자신을 비운 상태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기도하면서 자신을 비워낼 수도 있다. 가톨릭의 기도는 마음속에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회생활을 하면서 온갖 욕심으로 가득 찬 병을 꽁꽁 묶어놓았던 뚜껑을 벗어던지고 병 속에 들어있는 모든 쓰레기들을 버려야만 한다. 공간이 있어야 그 공간을 하느님으로 채울 수 있다. 한 손에 탐욕을 움켜쥐고 있으면, 버리지 않는 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손이 없다. 손바닥을 활짝 펴고 다른 손으로 손바닥의 오물들을 모두 떨쳐버려야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손이 비로소 준비된다. 먹고 쉬는 것을 통해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비우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빈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제일 마지막에 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님께서 피정에 참여하신 신도들에게 잘 먹고, 잘 쉬고, 기도하라는 말씀하신 것 속에 이미 피정의 의미가 모두 들어가 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내일이다.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다. 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깨달은 후에 중생을 구제하라는 말씀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깨달음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이유는 바로 중생구제에 있다. 중생구제 없는 깨달음은 그저 욕심과 자기만족에 불과할 뿐이다. 신부님이 당신의 깨달음의 과정과 경험을 글로 정리해서 세상에 내놓은 이유는 바로 신자들을 위한 간절한 마음 때문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의 마음이 그로 하여금 책을 발간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안토니오 신부님은 바로 부처님이다. 우리 주변에는 부처님들이 많이 계신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어둡기 때문에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할 따름이다. 집에는 아내 부처님이 계신다. 가족이라는 부처님들도 계신다. 바깥에는 코로나 극복을 위해 애쓰고 계시는 부처님들도 계시고, 사업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해주시는 부처님들도 계신다.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시는 부처님들도 계시고, 화재 진압을 위해 몸을 던지는 부처님들도 계신다. ‘부처님 오신 날’ 수많은 부처님들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고 있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다. ‘부처님 오신 날’은 음력 사월 초파일만이 아니라 나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다. 또한 ‘부처님 오신 날’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가득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