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365] 행복한 책 읽기 8회기(내 마음의 도덕경)

걷고 2022. 4. 27. 11:12

날짜와 거리: 20220424 - 20220426 26km
코스: 인왕산 둘레길 (화요 저녁 걷기) 외
평균 속도: 3.9km/h
누적거리: 6.642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화요일은 일주일 중 가장 바쁜 날이다. 오전 10시에서 오후 1시까지 수녀님이 진행하는 ‘행복한 책 읽기’ 모임에 참석해서 읽고 온 책에 대한 나눔의 시간을 갖는다.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프랑스인 예수회 소속 서명원 신부의 강의, ‘그리스도와 불교 간의 대화’ 모임에 참석한다. 한국 불교만을 접한 내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는 강의이기도 하며 동시에 불교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이 두 모임은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불교 외의 타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상식도 없는 내게, 또 한국 불교 외의 불교를 접하지 못한 내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고마운 모임이다.

두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오후 5시. 30분 정도 낮잠을 잔 후에 저녁 식사를 하고 화요 저녁 걷기 길 안내를 위해 집을 나선다. 오늘 진행하는 길은 서대문 안산 자락길과 인왕산 자락길, 초소 책방을 지나 윤동주 문학관에서 마친 후 경복궁 역까지 걷는 길이다. 인왕산 자락길의 일부를 걷고, 인왕산 자락길을 걸으며 성곽의 야경과 서울 야경을 볼 수 있는 길이다. 두 길을 엮어서 길을 만드니 제법 걷기 좋고 보기 좋은 길이 만들어진다. 길을 잘 알게 되면 이 길과 저 길을 연결시켜서 다양한 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길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우리가 잘 몰라서 둘러가기도 하고, 헤매며 살아가기도 하고, 물어서 찾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길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경험과 이해를 갖게 된다면 길을 찾는 요령도 습득하게 되고, 원하는 길을 만들어 갈 수도 있다. 삶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삶 자체를 고통이라고 하지만, 고통을 이해하는 방법과 태도에 따라 고통이 행복이 되기도 하고, 고통이 삶의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배움의 길이 곧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데에 있음을 강조하는 유교, 갓난아이와 같은 청정한 빈 마음을 회복하여 도를 직관하라는 도가, 그리고 분별심을 버리고 청정심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불성을 깨닫는 길이라고 가르치는 불교, 이와 같은 동아시아 전통의 가르침은 주로 인간 자신의 내면세계에 관심의 초점을 두는 내향적 사유를 제공한다.” (본문 중에서)

‘도덕경’에 나오는 이 글은 비록 이름과 모양이 다른 종교지만 추구하는 길은 같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산을 오르기 위한 다양한 루트는 비록 가는 길은 달라도 모두 정상을 향해 가는 루트이다. 정상에 오른 후에는 어느 길을 통해 올라왔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정상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수고했다고 안아주며 반기기도 한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그 단순함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미 알고는 있지만 알음알이로만 알고 있고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이 헤매거나 중간에 포기하기도 한다.

“사람은 닭과 개를 잃어버리면 곧바로 찾아 나서지만, 본래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그것을 찾으러 나서지 않는다.” (맹자, 본문 중에서)

이 글을 읽으며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는 법화경에 나오는 ‘화택(火宅)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탐욕과 애욕의 불길이 가득한 세상이므로 빨리 불타는 집에서 뛰어나와 불 끄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대부분 중생들은 오히려 불나방처럼 볼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탐욕과 애욕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두 태우며 살아간다. 탐욕은 물질적인 탐욕과 명예를 추구하는 탐욕 등이 있고, 애욕은 육체적인 쾌락과 몸의 안락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탐욕을 추구하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화를 낸다. 분노와 탐욕의 근간에는 어리석음이 자리 잡고 있다. 어리석음은 무명(無明)을 의미한다. 밝지 못한 마음을 지혜의 빛으로 녹여서 명(明)의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 먼지가 가득 낀 거울은 제 모습을 제대로 비출 수 없지만 먼지를 모두 제거하면 모든 사물의 바른 모습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어떤 상황, 사물, 사람들과 마주칠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과거의 경험과 알음알이를 바탕으로 바라보니 괴로움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무명을 명으로 바꾸는 작업은 바로 거울의 먼지를 제거하는 작업이다. 그 작업의 출발은 분별심을 없애는 일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현동(玄同)의 경지는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 경지가 추구하는 바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소요유란 단순히 유유자적하며 노니는 것이 아니라, 수양 공부를 통해 도를 체험한 자가 모든 상대적이고 이원론적이며 차별적인 태도를 뛰어넘어 우주만물의 변화에 순응하면서 어디에도 얽매이거나 집착한 바가 없는 마음으로 거리낌 없이 세상과 소통하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한다.” (본문 중에서)

이 글을 읽으며 승찬대사의 신심명(信心銘) 구절이 떠올랐다.

至道無難 唯嫌揀擇 (지도무난 유혐간택)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但莫憎愛 洞然明白(단막증애 통연맹백)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간택'한다는 것은 분별하고 시비를 가리는 일이다.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 좋고 싫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 느낌이 옳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거나 강요하기도 한다. 이는 매우 자기중심적 사고로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마음이 없는 무지의 다른 얼굴이다. 자신의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때문에 자신은 언제나 옳고 타인은 틀리다는 주장을 한다. '분별'한다는 것은 좋고 싫음을 나눔으로써 좋은 것은 계속해서 유지하기를 바라고 싫은 것은 빨리 없애기 위해 애쓰는 것을 의미한다. 간택은 바로 분별심이고,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이다. ‘자기’를 벗어나지 못한 모든 판단과 결정은 결코 올바른 결정이 될 수가 없다. ‘자기’라는 먼지가 자신의 깨끗한 마음인 거울에 가득 끼어있기 때문에 여실지견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나 자신과 모든 사람들이 모두 분별심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 ‘자애로움(慈)’과 ‘검소함(儉)’, 그리고 ‘세상에 처함에 있어 감히 잘난 체하여 앞으로 나서려 하지 않음(不敢爲天下先 불감위천하선)’, 이 세 가지 삶의 태도를 <도덕경>은 세 가지 보물로 칭하고 있다.” (본문 중에서)

‘자애로움’은 탈 자아 중심적 행동으로 타인에 대한 존중과 섬김을 의미한다. ‘검소함’은 욕심과 집착을 비워내는 삶의 태도이다. ‘나서려 하지 않음’은 겸손을 의미한다. 나만의 삼보는 무엇일까? 자비와 사띠(sati), 그리고 보시(布施)이다. 따뜻한 마음이 부족한 내게 가장 중요한 마음이 바로 모든 존재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자비심이다. 자애 명상 수행을 통해 조금씩 채워나가고 있다. 사띠는 일상 속 깨어있음이다. 행동, 말, 마음속 생각, 느낌, 외부 환경 등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깨어있는 상태에서 빨리 알아차리고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바라보고 지켜보면 사라진다. 보시는 갖고 있는 것을 나누는 일이다. 작은 기부도 될 수 있고, 재능을 통한 봉사활동도 할 수 있고, 일상 속 사소한 도움을 주는 행동도 될 수 있다. 최근에 다시 개인상담을 시작했다. 심리상담도 내가 할 수 있는 보시 중 하나이고,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보시이자 소명일 수도 있다. <도뎍경>과의 인연에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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