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359] 행복한 책 읽기 6회기 (집념의 인간 야곱)
날짜와 거리: 20220410- 20220412 29km
코스: 한강공원과 월드컵 공원 외
평균 속도: 4.4km/h
누적거리: 6.537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행복한 책 읽기 6회기 모임은 ‘집념의 인간 야곱’을 읽고 나누는 시간이다. 이 책은 비신자인 내가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야곱이라는 인간에 대한 거부감, 야곱의 어머니가 하는 비양심적 행동 등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인간을 택했을까? 물론 종교적 상징을 갖고 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전히 거부감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수많은 탐욕과 못된 짓을 저지른 사람도 하나님에게 온전히 의지한다면 하나님의 자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야곱은 인간의 모든 양면을 지닌 평범한 인간이다. 장자권에 대한 집념으로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억지로 받아낸다. 형에 대한 두려움으로 집을 떠나야만 했고,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못된 장인 밑에서 14년간 무보수로 일을 했고, 한 명의 여인을 얻기 위해 그의 언니를 아내로 맞이해야만 했다. 12명의 자식을 얻지만 그들의 거칠고 잔인한 성격 탓에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딸이 강간당하기도 했고, 야곱의 소실이 맏아들과 불륜을 저지르기도 했다. 아내와 요셉을 잃고 비탄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고, 손자들이 기근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의 삶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바로 ‘업보(業報)였다. 행한 만큼 반드시 돌아오는 섭리이자 철칙이다. 맨 처음 장자권에 대한 욕심만 버렸어도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쌍둥이 형과 함께 한 태(胎)에 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업보일 수도 있다.
그에게 단 한 가지 집념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이 늘 함께 계신다는 믿음이다. 비록 믿음이 바로 실천으로 연결되지는 않더라고 그 믿음만큼은 지키고 싶어 하는 집념은 버리지 않고 살아간다. 그 집념은 그를 암흑에서 광명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끈이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한 그는 언제든 자신을 버리고 또는 비우고 하나님에게 온전히 의지할 수 있게 된다. 인내와 집념만이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다. 인내와 집념은 용광로와 담금질이다. 잡철을 걸러내어 순수한 철로 변화시키는 용광로의 강렬한 열기를 견뎌내야만 하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강철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담금질을 버텨 낼 집념이 필요하다.
“삶에 놓인 짙은 어두움은 비록 부족함과 허물 때문에 형성되었다 할지라도 하느님은 그것을 은총의 통로로 이용하신다. 그리하여 삶에 놓인 죄스러움의 어두움은 하느님의 신적 그림자로 전환된다. 죄스러움의 어둠이 짙으면 짙은 만큼 빛이신 하느님은 우리 옆에 더욱 가까이 계시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에 강하게 남은 글귀는 바로 “이 세상 떠돌기 벌써 백삼십 년이 됩니다. 얼마 되지는 않으나, 살아온 나날이 궂은일 분이었습니다. (47.9)”이다. 60대 중반의 내게 삶은 바로 궂은날의 연속이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고,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후자에 가깝다. 이제야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열탕과 냉탕을 뛰어다니고 있고 가끔은 온탕에 몸을 담그며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한 가지 다행스럽게 느낀 것이 있다면 양쪽을 뛰어다니는 횟수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고, 시간이 조금씩 짧아지고 있어서 편안하게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궂은날의 이유는 바로 탐욕 때문이다. 내가 있다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자신을 위한 탐욕을 부리고, 그 탐욕이 원하는 만큼 성취되지 못하면 분노를 표출한다. 불교에서 삼독(三毒)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탐진치(貪嗔癡)'인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은 마음이다. 가장 먼저 다스려야 할 것이 바로 어리석음이다. 어리석기에 탐내고 화는 내는 것이다. 어리석음의 이유는 바로 ‘내가 있다’라는 잘못된 인식이다. ‘무아(無我)의 자각과 체득’이 가장 중요한 부처님의 가르침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없고 오직 ‘나라고 생각하는 나’만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어리석음의 수렁 속으로 점점 더 빠져들게 된다. 어리석기에, 즉 나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기에 늘 남과 비교하고 상대적 빈곤감에 원망과 분노만 쌓여가기도 한다. 어리석기에 자신과 남이 다르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타인처럼 살고 싶어 한다. 주인이 없는 꼭두각시 인생이다.
존 던의 영성시에서 불교와 가톨릭의 가르침이 만난다.
“(중략) 나는 당신을 지극히 사랑하고 또한 사랑받길 간절히 원하지만,
당신의 적과 약혼한 상태입니다. 나를 파혼시키시고,
그 인연을 끊어 버리소서.
(중략) 당신이 내 마음을 빼앗기 전에는 결코 자유함이 없으며,
당신이 나를 능욕하기 까지는 정절을 지킬 수 없나이다.” (본문 중에서)
‘당신의 적’은 바로 ‘나’라는 자의식이다. ‘나’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한 부처가 될 수도 없고, 하나님과 만날 수 없다. 억지로라도 ‘나’로부터 ‘나’를 떼어내야만 한다. 지금까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생이별을 해야만 한다. 그 아픔은 크겠지만, 큰 만큼 후련함과 통쾌함이 있다. ‘나’라는 의식이 있는 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나’를 철저하게 없애기 위해 처절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내 안의 잡철들을 뽑아내어 순수한 강철로 만들어내는 인고의 세월이 필요하다.
인고의 세월을 어떻게 보내야만 할까? 이 힘든 과정을 어떻게 해야 통과할 수 있을까? 가정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의 나’가 ‘참 나’가 아니라는 인식과 자각이 필요하다. 즉 ‘거짓 나’에 속아 수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 것에 대한 대분심(大憤心)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다시 속지 않을 수가 있다. ‘거짓 나’를 용서하지 말고 다시는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로 원수 취급을 해야만 한다. 그놈이 원수가 된 후에는 대신심(大信心)을 일으켜야 한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고 하느님이 늘 함께 계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발심(大發心)을 내야만 한다. ‘거짓 나’를 죽이고 ‘참 나’를 만나겠다는 의지와 집념이다. 부처가 되고 하느님을 만나겠다는 의지이다.
마지막 한 가지 작업이 더 남아있다. 지금 이 순간 내게 오는 모든 상황을 판단하지 말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작업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하느님의 시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업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느 누구도 업보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업보는 받아야만 소멸된다. 누워서 침을 뱉으면 침이 얼굴에 떨어지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 침을 피하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피할 수 없다. 자신이 뱉어낸 침을 당당하게 맞고, 찬 물에 세수한 후에 다시 움직이면 몸도 마음도 가볍고 상쾌해진다. 자신이 지은 업을 궂은일이라 생각하면 평생 궂은일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지은 업을 당당하게 맞이하고 다시는 같은 업을 짓지 않으면 평생 궂은일을 당할 일도 없고, 궂은일이 있을 수도 없다. 오는 모든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기본적인 계율 지키고, 자신의 소명을 찾고 그 일을 하며 살아간다면 편안한 삶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과거에 다녀갔던, 또 앞으로 다가올 모든 어려운 상황은 자신이 뱉어놓은 침이라 생각하고 당당하게 맞이하자. 앞으로 다시는 침을 뱉지 않겠다는 집념을 실천하고, 여유가 있으면 남의 얼굴의 침도 닦아주며 살아간다면 함께 어깨동무하며 즐겁게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다. 더 이상 바라고 구할 일도 없다. 오늘도 좋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