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354]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은 이휘재이다. 불교 인연으로 받은 법명은 법천이다. 걷기 동호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닉네임은 걷고이다. 집에서는 남편이고, 아빠이고, 할아버지이며, 동시에 사위이고, 매형이고, 동생이며 아주버니이다. 사회에서는 사장님, 전무님, 휘재, 형, 동생으로 불린다. 이름이 ‘나’일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부모님이 이재휘라고 지어주셨다면 나는 ‘이재휘’로 불렸을 것이다. 법명이 ‘천법’으로 지어졌다면 ‘천법’으로 불렸을 것이다. 이름은 ‘나’이면서 동시에 ‘나’가 아니다.
하는 일은 무엇일까? 하는 일이 ‘나’가 될 수 있을까? 지금 딱히 하는 일은 없다. SNS에 자신을 소개한 글에는 ‘걷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상담심리사’라고 쓰여 있다. 걷기 동호회에서 활동하며 가끔 길 안내자 역할을 한다. 친구들과 걷기 소모임도 하고 있고,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에는 혼자 걷는다. 그리고 걸으며 떠올랐던 생각들을 글로 정리한다. 어느새 ‘걷기’와 ‘글쓰기’는 일상이 되었다. 평생 함께 할 친구들을 만난 것이다. 지금은 이 친구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상담심리사는 인생 2막을 준비하기 위해 약 10년 전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상담 공부를 했고, 한국 상담심리학회 상담심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하지만, 만 65세의 나이 많고 상담 경력이 부족한 나를 필요로 하는 상담센터가 거의 없다. 덕분에 또 걷고 쓰고 놀며 지낸다. 그것도 괜찮다. 굳이 돈벌이하기 위해 나서지 않고, 지금 같은 방식으로 살아도 사는데 크게 불편함이 없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걷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상담심리사’가 지금의 나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 트레커도 아니고, 전문 작가도 아니고, 전문상담사도 아닌 그저 단순히 취미생활 수준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가끔 명상도 하고 책도 읽는다. 책을 읽고 걷고 글을 쓰며 나를 읽고 들여다본다. 명상을 하며 마음의 찌꺼기를 떨어낸다. 이만하면 잘 사는 삶이라고 스스로 만족하지만, 단 한 가지 아내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해 주지 못한 미안함, 그럼에도 늘 나와 가족들을 챙기는 아내를 보며 감사함을 느낀다. 나의 아내는 대보살이다. 아내 덕분에 그나마 지금처럼 살 수 있었고, 아내 덕분에 조금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아내는 늘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 그런 모습이 나를 변화시켰다.
사업을 할 수 있는 깜냥도 안 되는 사람이 사장 역할을 하면서 수많은 업을 쌓았다.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덕분에 나를 돌아보며 조금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고통이 준 선룸이다. 아내는 예전보다 지금의 내 모습이 많이 편해지고 좋아졌다고 한다. 나는 모두 아내 덕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실이다. 이기적이고, 강박적이고, 권위적이고, 통제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충동적인 나를 37년 넘게 지켜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내는 이미 큰 보살이다. 나는 아내를 존경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말다툼하기도 하고 가끔 큰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그리곤 바로 후회한다. 아내 생각하면 그저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이 있을 수 없다. 화내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고, 특히 아내에게는 절대 화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빈도와 강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2017년 환갑을 맞이해서 산티아고를 다녀왔다. 귀국 길에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 씨를 프랑스에서 만났다. 그는 퇴직 후 실크로드 3만 KM를 4년에 걸쳐 걸은 후 ‘나는 걷는다’라는 책을 발간했다. 걷기를 통한 청소년 교화 프로그램인 ‘쇠이유(seuil)’이라는 단체를 만든 사람이다. 쇠이유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약 40분 정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걷기를 통한 심신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걷고의 걷기 학교’라는 명칭도 만들었다. 내년부터 천천히 아주 작은 규모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걷기, 명상, 심리상담을 접목한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다. 프로그램 진행 방식은 지금도 계속해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개발 중이다. 아직 구체화되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만들어 나가면 될 것이다. 평생 할 일이니 급히 서두를 필요도 없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기만 하면 된다.
걸으며 느낀 점을 글로 옮겨서 ‘걷고의 걷기 일기’라는 책을 발간하고 싶다. 나의 생각과 느낌을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며 살고 싶다. 가끔 SNS에 올린 글을 읽으며 도움이 되었다는 댓글을 볼 때마다 좀 더 책임감을 갖고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한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길, 만남, 독서와 성찰, 일상 속 얘기들이 콘텐츠가 될 수 있다. 일기를 쓴 지 2년 5개월 정도 지나간다. 지금까지 약 350편의 일기를 썼다. 죽을 때까지 쓴다면 최소한 1,000편 이상 될 수 있다. 딸이 이 일기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낸다면 좋을 것 같다. 또 그 책이 후배들과 손자들에게 삶의 지침이 될 수 있다면 죽은 후에도 흐뭇해하며 웃을 것 같다.
걷기, 글쓰기, 독서, 상담심리, 명상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나의 삶을 대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나’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이 일을 좋아하고 살아가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으나, 아직도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하는 놈은 있는데, 막상 하고 있는 주인 놈은 보이지 않고 찾을 수 없다. 꼭두각시가 춤을 추는데 꼭두각시를 움직이는 놈이 보이지도 않고 찾을 수도 없다. 어쩌면 이놈을 찾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여전히 오늘도 이 놈을 찾고 있다. 이놈 찾는 일을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마음만은 아직도 지니고 있다. 죽는 순간까지 못 찾을 수도 있겠지만, 죽는 순간까지 이 놈을 찾겠다는 의지는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글로 정리해보니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확실해졌다. 물론 살이 붙어 여러 가지 갈래가 만들어질 수는 있겠지만, ‘걷고의 걷기 학교’가 나의 길이 되고 ‘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그간 꾸준히 해왔던 명상, 걷기, 글쓰기, 상담심리, 독서는 모두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걷고의 걷기 학교’를 가리키고 있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늘 들고 다녔던 조가비에는 여러 개의 선이 있는데, 이 선은 모두 한 곳으로 향한다. 산티아고 데 꼼뽀스텔라. 순례자는 이 길을 향해 다양한 루트를 걷고, 나는 걷기 학교로 가기 위해 다양한 길을 걷고 있다. 걷고 또 걷는 ‘걷고’는 나를 가장 잘 표현한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까지 찾은 답은 ‘모른다’, ‘여전히 모르겠다.’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이 답을 찾는 것이 나의 삶이고 나를 찾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 어쩌면 아직까지 찾지 못한 ‘나’가 이미 지금의 ‘나’일 수도 있다. 비록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