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314] 선재길과 불씨

걷고 2022. 1. 5. 12:31

날짜와 거리: 20220104 14km
코스: 노을공원 외
평균 속도: 4.7km/h
누적거리: 5,800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날씨가 제법 쌀쌀하지만 점심 식사 이후에는 햇빛도 좋고 날씨도 조금 누그러져서 걷기에 편안하다. 덴탈 마스크를 쓰고 걸으니 안경에 김이 서리지 않아서 좋다. 늘 KF94 마스크를 쓰고 걸어서 시야가 불편했다. 걸을 때에는 덴탈 마스크를, 실내에 들어갈 때나 사람들을 만날 때는 KF94로 바꿔 쓰는 방법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우리는 상황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많이 걷고 싶은 날은 등산화를 신고 뜨거운 물을 작은 보온병에 담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물과 등산화, 그리고 추위에 몸을 감싸주는 옷만 있으면 모든 준비는 끝이다. 굳이 간식이나 커피 등 번거로운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한강변을 따라 걷다가 노을공원 오르는 계단을 택했다. 몸에 긴장감을 주고 싶어서였다. 계단의 개수가 558개이다. 허벅지에 느껴지는 긴장감도 있지만, 긴장감이 주는 희열도 느낄 수 있다. 두 계단씩 오르기도 하고, 숨이 차면 한 계단씩 오르기도 한다. 발 앞부분만으로 계단 끝을 밟으며 오르는 재미도 좋다. 몸은 조금 앞으로 숙이며 걷는다. 발의 앞부분만으로 지탱하기에 몸의 중심이 뒤로 움직일 수 있어서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계단을 오르고 길을 걸으며 떠오르는 생각과 행동, 감각 등을 알아차리고 걷는 재미도 소박한 즐거움이다. 계단을 모두 오른 후 노을공원을 걷는데 햇빛이 비친 곳과 그늘 진 곳의 차이가 눈의 잔재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풍경을 사진 찍으며 마치 아주 재미있는 놀잇감을 발견한 듯 홀로 즐거워한다. 일상의 사소한 즐거움이 행복을 가져다준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고 빈도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어제 걷기 동호회에 ‘오대산 선재길’을 간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두 번 갔던 길이지만 그 공지를 보는 순간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코로나로 인해 인원 제한이 있어서 이미 인원은 마감된 상태였다. 아쉬웠다. 아쉬움을 댓글로 표현하고 마음을 접었다. 그런데 계속 그 길이 떠올랐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길’ 보다는 ‘월정사’가 떠올랐다. 책에서 읽었던 문구가 기억난다. “우리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를 그리워한다. 뉴요커들은 뉴욕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고 뉴욕을 그리워한다.” 맞는 말이다. 그 장소와 관련된 추억, 만났던 사람, 느꼈던 분위기와 기분, 날씨, 바람 등을 그리워한다. 월정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 어제 올라온 공지는 그 기억을 소환시켰고, 그 기억이 선재길에 대한 갈증을 몰고 왔다.

 

 2004년 우연히 TV에서 방영하는 ‘월정사 단기 출가 학교’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었다. 일반인들이 한 달간 스님들과 똑같은 수행생활을 하는 행자(스님 인턴 과정) 프로그램이다. 실제로 그 프로그램을 마친 후 출가를 하는 분들이 10% 이상이라고 한다. 참가자들의 수행과 일상을 영상에 담았다. 또 참가자들의 참여 동기와 수행하는 느낌은 어떤지에 관한 인터뷰  내용도 있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며 참가하고 싶었다. 2005년 여름에 신청해서 동참했다. 그 당시 나는 사업 후유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런 의욕도 없었고,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뭘 해야 할지도 몰랐고, 그런 생각조차 할 여력도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도피의 방편으로 그 프로그램에 동참했던 것이다. 

단기출가 기간에 경험했던 일들이 마치 영화를 보듯 머릿속에 영상으로 되살아난다. 둘째 날 약 1km의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삼보일배하며 걸었다. 장맛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한 여름에 행자복을 입고 삼보일배를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눈에는 눈물과 빗물이 혼합되어 흘러내렸다. 안경은 벗어버렸다. 그 와중에도 이마가 땅에 닿으면 아프니까 물이 고인 곳에 이마를 처박기 위해 좌우를 살피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속으로 웃기도 했다. 새벽 3시 기상, 저녁 9시 취침이다. 하루 종일 일정은 빈틈이 없다. 예불 모시고, 먹고, 자고, 수행하고, 운력(노동)하는 것이 반복된 생활이다. 물론 매일 또는 매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공양(식사) 후 식기 세척은 각자의 몫이다. 삼보일배를 성공(?)리에 마친 다음 날 삭발식이 있다. 삭발식을 하며 한 없이, 원 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유 없이 저절로 흐르는 눈물이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삭발식을 한 후 자른 머리를 종이에 접어 전나무 숲 끝 부분에 미리 파놓은 땅에 묻었다. 지금 그곳에는 삭발 탑이 세워져 있다. 단기 출가자들의 머리카락이 묻힌 곳이다. 머리카락을 불교에서는 무명초(無明草)라고 한다. 잡초의 뿌리처럼 강한 집착을 지닌 어리석음을 뜻하는 의미다. 무명초를 끊어내는 삭발식은 번뇌를 단절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무명초를 잘라내어 묻은 뒤 1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무명초는 세지도 않고 머리 위에서 매우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근원을 뿌리 뽑지 못한 무명초는 저절로 자라게 되어있다. 단기출가 마지막 주에는 상원사에서 적멸보궁까지 돌로 만들어진 계단을 삼보일배하며 오른다. 약 2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적멸보궁에서 예불을 모시며 시퍼렇고 예리한 지혜의 금강도를 느낄 수 있었고, 서서히 차오르는 햇빛을 받으며 따뜻한 자비심도 느낄 수도 있었다. 회향(수료식) 전 날 저녁 예불 모신 후 스님의 죽비소리에 맞춰 모든 수행자들이 새벽 예불 전까지 곡소리 내며 3,000배를 마쳤다.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

선재길 공지가 월정사를 소환시켰고, 월정사는 단기출가를 소환시켰다. 단기출가는 그간 다녔던 사찰과 사찰 부근의 옛길을 다시 소환시켰다. 도로가 발달하면서 천년 사찰 옛길들이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길들이 다시 복원되고 있다. 선재길은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가는 옛길이다. 옛길 개울 건너편에 도로가 생기면서 기억 속으로 사라진 길이었다. 미황사의 달마 고도 길도 몇 년 전 조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봉화의 축서사에서 영주 부석사까지 이어지는 의상대사 길도 있다고 한다. 송광사에서 선암사 가는 길은 약 30여 년 전 송광사 단기 출가를 마친 후 고무신을 신고 넘었던 기억이 있다. 수년간 자주 찾아가서 며칠 씩 머물렀던 부안 월명암에서 내소사 가는 길도 매우 아름답다. 해인사 소리길도 있다고 한다. 사라진 사찰 옛길을 걸으며 사진도 찍고, 사찰 관련 자료도 찾아보고, 스님들과 대화도 나누고, 걸으며 느낀 소감도 정리해서 잃어버린 사찰 옛길을 소개하는 책을 한 권 발간하고 싶다. 심신이 지친 분들이 사찰 옛길을 걸으며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발원한다. 사찰 옛길을 천천히 걷듯, 이 작업도 천천히 할 것이다.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계획이었는데, 선재길 공지가 불씨에 바람을 불어주었다. 시절 인연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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