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305] 정동진(正東津) 여행

걷고 2021. 12. 12. 11:42

날짜와 거리: 20211206 - 20211211 74km
코스: 정동진에서 금진해변까지 외
평균 속도: 3.8km/h
누적거리: 5,613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며칠간 지자체 면접관으로 다녀왔다. 나흘간 하루 종일 면접을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면접 응시자들의 긴장감과 간절함을 느끼며 가능하면 집중력을 잃지 않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려고 나름 최선을 다 했다. 약 10여분의 면접 시간 내에 판단을 내리는 일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면접위원들의 의견이 대부분 일치해서 심리적 부담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다.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어려워서, 퇴직 후 일을 하고 싶어서, 전문 분야가 없는 사람들도 지원할 수 있어서, 경력 단절된 후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서 등등 각자 지원 동기도 다양하다. 짧은 면접시간이지만 성실하고 우수한 분들과 그렇지 못한 분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면접 응시자들의 태도, 얼굴 모습, 단어 선택, 면접장에 들어오고 나가는 표정과 몸가짐 등에서 차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인 시각이 가장 평범하지만 또한 가장 정확하다. 면접 마치고 나오면서 나 역시 늘 누군가에게 어떤 판단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평상시 몸가짐과 마음가짐, 그리고 말하는 태도와 단어 선택 등에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노동’과 ‘휴식’은 같은 선상에 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노동’ 후에 찾아오는 ‘휴식’이 있다. 같은 연결선상에 존재한다. 하지만 ‘노동’의 반대 개념이 ‘휴식’이다.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휴식’은 ‘노동’의 전제 조건이다. 휴식 없는 노동은 존재할 수 없다. 바꾸어 얘기하면 휴식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수적인 요건이 된다. 오르막을 오른 후에 땀을 닦고 잠시 쉬면서 내려가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오르막을 오르는 힘든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내려가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가 없다. 이 개념은 직업이나 할 일이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반면 직업이 없거나 할 일이 없는 사람의 경우에는 ‘휴식’이 ‘노동’이 되기도 한다. 시간과의 싸움이 바로 ‘노동’이다. 이 싸움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소진시키기도 한다. 퇴직한 사람들, 실직한 사람들, 경력 단절된 사람들 등 많은 사람들이 할 일을 찾지 못해 시간과 자신과의 피곤한 싸움을 매일 해야만 한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시간과의 싸움’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요즘 들어 가끔 한다. 홀로 또 함께 지내는 방법을 각자 찾아야 한다. 이 싸움은 길고 긴 싸움이다.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나는 싸움이 아니고 죽기 바로 직전까지 이어지는 지루한 싸움이다. 하지만 이 싸움이 바로 삶의 활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싸움’은 바로 ‘놀 거리’가 되기도 하고, ‘할 거리’가 되기도 하며, '일거리’가 될 수도 있다.

면접관 기회를 제공해주고 함께 면접을 진행했던 친구들과 정동진을 다녀왔다. 이 친구들과 가끔 서울과 지방 트레킹을 하며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나이 들어서 만난 친구들이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좋은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 덕분에 며칠간 면접관으로 다녀오게 되었고, 다음 주에도 지방에 내려가 이틀간 면접을 진행하게 된다. 나흘간 이어진 ‘노동’인 면접을 마친 후 편안한 마음으로 기차를 타고 정동진으로 향하는 그 자체가 바로 ‘휴식’이자 ‘보상’이다.

(Photo by TH)

기차에 몸을 싣고 바깥 풍경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다. 마음은 차분하고 풍경은 저절로 바뀌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안개가 짙은 바깥 풍경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우리네 삶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한발 앞으로 다가가면 안개는 물러난다. 삶은 그런 것이다. 보이지 않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직면하며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들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굳이 붙잡을 필요조차도 없다. 기차 안에 흐르는 가야금인지 거문고 연주 소리는 차분한 마음을 더욱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배낭을 선반에 올리고 한껏 편안한 자세로 의자 등판에 기대며 몸과 마음을 쉬고 또 쉰다. 편안하다. 서울의 모든 일들은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간다. 특별히 힘든 일상을 보낸 것이 아님에도 여행이 더욱 고맙고 즐겁게 다가온다. 오랜만에 일을 했다는 뿌듯함이 주는 작은 선물일 것이다. 아내는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가 저녁에 들어오는 내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진다고 했고, 나는 오히려 즐겁고 활기차다고 했다. 아내는 여행 당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차려주며 간식을 인원수만큼 준비해줬다. 삶은 달걀, 황남빵, 떡, 사과 등을 각각 개별 포장해서 나눠주라고 한다. 그런 아내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맙다.

(Photo by TH)

해변을 끼고 달리는 기차에서 바라본 바다는 마음을 설레게 한다. 정동진 역에 내리니 바로 앞에 바닷가가 펼쳐진다. 그 설렘은 바로 ‘자유’와 ‘해방감’이다.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사회적 책무로부터의 자유, 가정적 책임으로부터의 자유, 자신을 옥죄는 시간과의 싸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자유는 우리에게 심리적 해방감을 느끼게 만들어 준다. 역 근처에서 초당 순두부를 먹은 후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동진에서 금진해변까지 해파랑길의 일부 구간을 걸었다. 속을 든든하게 채우고, 마음은 자유와 해방감으로 가득하고, 발걸음은 가볍고, 하늘은 청명하다. 이 모든 것이 며칠간의 노동에 대한 준비된 보상이다. 노동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한다. 노동의 즐거움, 노동 후 휴식의 즐거움, 그리고 노동 후 돌아오는 보상의 즐거움이다. 면접관 역할을 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고 할 일이 있음에 대한 즐거움이 있었다. 또 일 자체가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노동의 보상이 바로 오늘 여행이고, 정동진을 찾은 것은 휴식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이다. 마음 맞는 좋은 친구들과 함께 하는 이런 즐거운 여행은 보상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그저 모든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묵호항에서 회를 먹은 후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오늘 참석하지 못한 한 친구가 자꾸 마음에 걸렸는데 고맙게도 청량리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고 고마웠다. 만나서 반갑고 바쁜 일정을 끝내고 피곤했을 텐데 역까지 나와 식사를 함께 할 수 있어서 고마웠다. 지하에 있는 중식당에서 요리와 함께 연태 고량주를 먹고 마셨다. 음식을 함께 즐겁게 먹고 마시는 것 또한 보상의 즐거움이다. 내년 1월 여행 일정을 잡았다. 어디로 갈 것인지는 결정하지 않고 날짜만 확정 지었다. 내년이 기대된다. 한 해 동안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고 즐거운 추억을 쌓았던 친구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모두 건강하시고 좋은 일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내년에 만나요. 감사합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