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296] 사고의 틀
코스: 다랑쉬 오름 외
평균 속도: 4km/h
누적거리: 5,295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재주 살이 하고 있는 딸네 집에 일주일 간 다녀왔다. 제주도를 그간 여러 번 다녀왔지만, 관광이나 걷기 위해 다녀온 것이 전부다. 그간 다녔던 곳은 대부분 사람들이 모이는 관광지나 올레길, 한라산 둘레길로 주거지와는 다른 곳이었다. 딸네 집은 제주시와 멀리 떨어져 있는 동쪽 끝 구좌읍으로 주변에는 대여섯 세대 정도만 있을 뿐이다. 일주일 내내 한 두 번 얼굴 마주친 이웃 사람들 외에는 다른 사람들을 볼 일이 없었다. 휴양지로는 아주 적합한 곳이다. 심심하지 않을 정도의 일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제주 살이를 한 두 달 정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차로 5분 정도 이동해야만 하고, 마트에 가기 위해 10분 이상 차로 이동해야만 한다. 이런 곳에서 홀로 한두 달 정도 칩거를 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삶을 성숙하게 만드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 떠오른다. 비록 세대는 다르지만 소로우의 삶의 방식처럼 살아가는데 제주 살이는 안성맞춤이다.
이번 기회에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연습을 많이 하게 되었다. 딸 부부와 두 손녀, 그리고 아내와 함께 한 공간에서 지내는 일은 즐거운 일이면서도 동시에 불편한 일이기도 하다. 늘 같이 살아온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결혼한 지 벌써 5년이 지났고 두 명의 아이들과 살아가는 딸네 삶 속에 우리 부부가 들어간 것이니 당연히 불편함이 따를 수밖에 없다. 좁은 공간에 네 명의 성인과 두 아이들이 서로 지지고 볶듯이 지내는 일은 서로 많은 양보와 이해를 필요로 한다. 우리 부부가 간 이유 중 하나는 손주들 돌보며 딸 부부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내는 매우 훌륭하고 충실하게 역할을 해내고 있었고, 나는 다소 뻘쭘하게 보내고 온 것 같아 딸 부부와 아내에게 미안하고 자신에게는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다.

하고 싶은 말은 반드시 해야만 편한 사람도 있고, 참고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의견이 수용되지 않아도 그냥 아무 일도 없듯이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의 결정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마움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로 표현하는 대신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미안함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고, 쑥스러워 표현하지 못하고 미안한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홀로 애쓰는 사람도 있다. 모두 살아온 경험과 학습을 통해 만들어진 삶의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이 방식 중 어느 것이 옳고 틀리다고 어느 누구도 감히 판단하거나 결정을 내릴 수 없다. 판단을 내리는 사람 역시 자신의 주관과 ‘사고의 틀’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람들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람은 사람들의 모임인 사회를 벗어나서 살아갈 수 없다. 물론 일정 기간 ‘자발적 고독’을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성숙하게 만들어 나가는 데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 기간 후에 다시 사회에 나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사고의 틀’은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불필요한 충돌을 발생시키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이런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을까? 늘 지니고 있었던 화두이다.
지금까지 내가 찾은 방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한 가지는 내 삶의 원칙을 지니고 살아가되 필요시 언제든지 수정과 보완을 유연하게 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에게 이 원칙을 절대로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타인의 어떤 언행에 대해서도 나의 ‘사고의 틀’로 판단을 내리지 말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어가는 것이다. 언행은 그간 살아오면서 만든 ‘사고의 틀’에서 나온 결과물이고 동시에 그 순간에 내린 최선의 방편이다. 이해하거나 넘어가는 것이 충돌을 피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지, 상대방의 틀에 맞서 자신의 틀을 강요하거나 상대방 틀이 잘못되었다고 불필요한 언쟁을 하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의 무의미한 낭비일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삶의 방식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필요하고, 성찰을 위한 ‘자발적 고독’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제주 살이를 하며 배운 점이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