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180] 마음공부 3

걷고 2021. 2. 24. 08:23

날짜와 거리: 20210223  2km

코스: 일상 속 걷기

누적거리: 3,272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마하시 수행 센터에서 위파사나 수행을 지도하시는 사야도 우 자나카의 법문을 정리한 책을 최근에 읽었다. 이 책의 요지는 두 가지다. 한 가지는 괴로움의 원인을 설명한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괴로움의 원인을 알게 되면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는 방법도 알 수 있게 된다. 그 가르침을 언제든 찾아볼 수 있게 정리하고 싶었다. 한 가지 조심스러운 점은 정리된 내용 중 일부 혹은 전체가 원래의 가르침과 어긋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나의 그릇 크기와 공부한 만큼 정리할 수 있다는 한계점이 분명히 있다. 잘못 정리된 점이 있다면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아직 공부가 무르익지 않았기에 왜곡된 시각으로 보고 정리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공부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無明)이다. 무명은 무지(無知)와 같은 뜻으로 일어나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 상황이나 주어진 일들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왜곡된 시선으로 보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런 무지로 인해 사견 (邪見)이 발생한다. 사견은 아견(我見)과 유신견(有身見)을 의미한다. 내가 있다는 ‘아견’과 몸이 있다는 ‘유신견’이 무명으로 인해 발생한다.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를 체득하는 것이 공부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됨으로써, ‘나의 몸’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와 ‘나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탐욕, 즉 갈애 (渴愛)가 발생한다. 바로 이 ‘갈애’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고통이 발생하게 된다. 괴로움의 시작이다. 갈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탐착과 혐오, 탐착은 원하는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욕심이고, 혐오는 싫어하는 것을 배척하려는 욕심이다. 이런 갈애로 인해 고통이 발생하게 된다. (무명 --> 사견 <아견, 유신견> -->  갈애 --> 괴로움)

 

 괴로움의 소멸은 바른 이해 (정견 正見)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몸과 마음 작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정견이 확립되면 무지가 사라지고, 무지가 사라짐으로써 사견이 발생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게 되고, 고통이 사라지게 된다. (정견 -->  무지 사라짐 -->  사견 사라짐 -->  갈애 사라짐 --> 괴로움의 소멸) 

 

“하나하나의 그리고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과정들을 그것들이 실제로 발생하는 대로 비판단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관찰할 때 그것들을 참된 본질에 대한 이해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바로 이것이 바른 이해이다. 이로 인해 무지가 사라지게 된다.” (본문 중에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몸과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인 사념처 (四念處)를 설명하고 있다. 육체적인 과정에 대한 마음챙김인 신념처 (身念處), 느낌이나 감각에 대한 마음챙김인 수념처 (受念處), 마음(의식)에 대한 마음챙김인 심념처(心念處),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의 현상에 대한 법념처(法念處), 이 네 가지를 사념처라고 한다. 

 

“대상을 선택할 필요가 없고, 단지 마음이 선택한 대상을 관찰해야만 한다. 위파사나 수행의 원리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인 현상들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지켜보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이 너무 단순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수행하다 보면 이런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마음 챙김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알아차리고 마음 챙김을 해야만 한다. 하려고 하는 행동들 (몸, 말, 생각)에 대해 마음 챙김 후 선택과 결졍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감각의 불쾌감을 자신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감각이란 정신적인 현상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즐거움 역시 마찬가지로 정신적 현상의 과정에 불과하다. 우리는 좋은 것을 많이 갖고 싶어 하고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어 하고. 싫은 것은 멀리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좋다거나 싫다고 느끼는 것 자체를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그 변하는 과정을 비판단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나’나 ‘나의 몸’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좋고 싫다는 느낌이 떠올라서 탐착과 혐오가 발생한다. 

 

 어제 마음이 불편했었다. 상담할 기회가 점점 없어지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다. 노인 상담사에 지원하려고 연락을 했는데, 나이 제한으로 인해 지원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늦게 대학원에 진학해서 평생 할 거리를 찾았다고 좋아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불편함이 하루 종일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바로 이때가 그 불편한 마음을 지켜보며 마음챙김을 할 수 있는 중요한 마음공부의 기회이다. 하고자 하는 의욕과 좌절된 마음 사이의 갈등을 바라보며 마음챙김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불편한 마음이 이어지면 다른 부정적인 생각들이 연이어 올라오고 결과적으로 오히려 자신을 더 불편하게 만든다. 첫 번째 화살을 맞은 후에는 빨리 치료해야 하는데, 두 번째 화살을 스스로 맞고, 연이어 세 번째 화살까지 맞게 된다.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불편한 마음을 비판단적으로 마음챙김 하며 바라보는 것이다. 괴로움 역시 정신적인 현상의 과정에 불과하다. 그런 불편함과 싸우는 과정 자체가 다른 불편함을 초래한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술’이다. 전날 친구들과 술을 한잔 했었다. 요즘은 술을 조금만 마셔도 몸이 아프고, 술기운이 오래 남는다. 그런 술기운이 남아 있어서 마음챙김을 방해하고, 마음챙김이 사라지면서 오랫동안 익었던 습관적인 태도가 자동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술은 마음공부와는 상극이다. 그래서 오계 (五戒) 중 불음주(不飮酒)라는 계율이 있나 보다. 

 

 “위파사나는 마음과 몸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한 직접적인 자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세 가지 특성이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의미한다. 모든 존재의 실상이 이 세 가지이고, 그 실상에 대한 체득을 하는 것이 바로 위파사나이고 마음공부이다. 위파사나 수행을 통해 일상 속 희로애락 속에서 굳건한 바위 같은 마음을 지니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아내가 책상 위에 꽃을 올려놓았다. 글을 쓰고 있는데, 꽃 향기를 맡고, 꽃을 보며 마음이 차분하게 정돈된다. 아내의 마음까지 느껴져서 더욱 고맙다. 어제의 불편한 마음이 글을 쓰면서 정리가 되고, 화병과 꽃을 보면서 차분해진다. 어제의 불편함을 사라졌고, 그 마음에 고마움이 차오른다. 이것도 세밀하게 바라보는 것이 마음공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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