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279] 지리산 둘레길 후유증
날짜와 거리: 2021006 7km
코스: 불광천 - 월드컵공원 - 문화 비축기지 - 불광천
평균 속도: 4.3km/h
누적거리: 4,967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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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을 열흘 간 다녀왔다.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지리산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황금 들판, 지리산 능선, 백운 계곡의 활기찬 물살과 물소리, 길가에 수북이 쌓인 밤과 감, 아름다운 다양한 길과 계단, 바람 소리, 청명한 하늘과 무심한 구름, 민박집의 정성스러운 음식, 길동무들과의 추억을 가득 담고 왔다.
몸은 아직 회복이 덜 된 듯하다. 자꾸 졸리고 단 음식이' 당긴다. 열흘간 매일 걸었던 것이 체력에 조금 무리가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몸 상태는 좋다. 몸무게를 확인해보니 출발 전과 거의 비슷하다. 어제는 집 밖에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만 머물렀다. 답답함보다는 무엇을 할지 몰라 당황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불과 열흘에 불과한데 그 기간이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었나 보다.
열흘 간 한 일이라곤 먹고, 자고, 걷고, 씻는 일 밖에 없다. 생활이 단순했다. 아침에 식사 후 무조건 나가서 걸었다. 걷기 위해 왔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걷기에 충실했다. 단순한 생활은 쓸데없는 걱정거리를 사라지게 만든다. 그럼에도 마음속에는 가끔 올라오는 불편함이 있다. 함께 걸은 길동무들과의 드러나지 않는 사소한 불편함 때문이다. 나 자신이 꽤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자신을 탓하기 이전에 타인에게서 원인을 찾는 나쁜 습관도 갖고 있다. 친구를 탓할 이유가 없다. 그 친구가 지은 업은 스스로 받게 되어있다. 그 친구로 인해 내 마음속에 발생하는 모든 업은 내가 받게 된다. 업보가 두려운 것이 아니고, 업을 만들고 있는 어리석음이 두렵다.
출근할 곳이 없으니 당연히 아침에 기상 후 할 일이 없다. 습관대로 글을 쓰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 후기를 정리하고 있다. 걸으며 시간 나는 대로 메모했던 자료를 바탕으로 다시 정리하고 있다. 매일 하루치 후기를 쓰고 있다. 작성 후 SNS에 올리면 오전 시간이 끝난다. 오후에도 특별히 할 일이 없다. 떠나기 전에도 같은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뭔가가 어색하고 적응이 되지 않는다. 지리산 후유증이다.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어제부터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꺼내어 다시 읽고 있다. 지리산과 관련된 상황이 많이 나오는 책을 읽고 있다. 지리산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게 하고 싶고, 지리산에 담긴 선조들의 한을 느끼고 싶다.
오늘은 오후 네 시경 걷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불광천, 월드컵 공원, 문화 비축기지를 걸었다. 예전과 같은 길인데도 뭔가 느낌이 다르다. 지리산에서 보고 온 풍경과 많이 다른 도심의 풍경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열흘이 그만큼 삶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놀랍다.
나의 삶은 지리산 떠나기 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일상도 당연히 같다. 그런데 뭔가 생소하게 느껴진다. 혼이 약간 빠진 느낌도 든다. 또는 아주 중요한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 오는 심리적 진공 상태 같은 느낌도 든다. 또는 자극이 없어진 상태에 맞이하는 무기력 같은 증상이라는 느낌도 든다. 약간 넋이 나간 느낌이다. 열흘 걷기에 빠졌으니, 일상으로 돌아오는데 열흘이 필요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만큼 정신없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심리적 반응일 수도 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평상시처럼 명상을 했다. 신문을 읽고 후기를 썼다. 오전이 끝났다. 점심 식사 후 TV 잠깐 보고 ‘토지’를 읽었다. 잠이 와서 잠깐 낮잠도 잤다. 그리고 걸으러 나갔다. 일상으로 천천히 돌아오고 있다. 후유증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즐거운 휴식을 취했다는 증거이다. 지리산에서 온 몸과 마음으로 즐기듯, 다시 일상에서 온 몸과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온몸과 마음이 반드시 최선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걷듯이 집 안에서 할 일을 하면 된다.
이번에 같이 걸었던 길동무들이 언제 또 걸을까 하고 연락이 왔다. 금주 금요일에 북한산 둘레길을 한 친구가 안내해서 걷기로 했다. 다음 날인 토요일에는 걷기 동호회에서 서울 둘레길 안내를 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하지만, 열흘간 즐긴 만큼 나는 변했다. 변화는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나는 앞으로도 또 변하고 변할 것이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변할 것이다. 이런 변화가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기를 바란다.